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앙대학교/역사 (문단 편집) ===== 학생 생활의 지도와 교수의 활동 ===== 오늘의 상식에서 보더라도 당시 중앙보육학교의 학생 생활에 대한 지도/감독은 매우 엄격하였다. “행동에 대한 지도만은 철저히” 라는 것이 불문율이었으며 ,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생에 대해서는 물론, 하숙이나 자택에서 통학하는 학생에 대해서도 담임 교사가 방문하여 생활을 살피며 되도록 가깝게 모여서 지내도록 지도하며 서로 돕고 서로 규제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독서하는 데 있어서도 양서(良書)만 골라서 교장이나 교사의 동의를 얻은 후 읽도록 권장하는 정도였다. 임영신 교장이 취임한 이후 중앙보육학교의 기풍은 더욱 일신되었는데, 그의 항일 기질은 더욱 뜨거워졌다. 일제 때의 학원, 특히 사립학교에는 항일적 체질, 반일적 기풍이 감도는 것이 공통된 현상이요 전통이었다. 한국인으로서는 배워도 출세는커녕 적당한 일자리를 얻는 것도 하늘에 별따기 같아 “배워서 무엇하느냐?” 하는 낙망과 분노 속에서 헤메이는 학생이 많았다. 이러한 학생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위로/격려해 나갈 만한 인격 있는 교사가 요망되는 상황이었지만, 총독부 학무 당국은 교사 채용에 있어서 그러한 학생들에게 희망과 달관을 주는 인격적 면이나 교육자적 열성은 도외시하고, 오직 일본어에 숙달하고 정규 전문대학을 졸업하였는지 여부의 외형적인 것에 치중하여 소위 ‘간판 위주’ 와 ‘자격 교원’ 채용을 권장하여 학생과의 갖가지 대립을 일으켜 맹휴 사건의 원인이 되는 등 학해(學海)의 풍파는 높아만 갔다. 그러나 엄하면서도 자애로운 분위기 속에서 훌륭한 교장과 교사 밑에서 민족교육을 받는 중앙보육학교 학생들의 학교에 대한 애착심은 남달리 컸다. 다음 소개하는『여성(女性)』 1939년 2월호에 실린 문이순(文李順)이라는 졸업생의 졸업 소감은 당시 중앙보육학교의 교육내용과 학생지도가 어떠하였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흐르는 눈물, 그 눈물 속에 지나간 학창 생활의 꿈 같은 추억들, >평화의 동산에서 배우라 울리는 거룩한 종소리. >봄날의 푸른 잔디에 엎드려 클로우버 네 잎사귀를 얻으면 행복이 온다고 하여 애써 모으던 그 때! >그 말이 참말이 아닌 줄은 이미 알면서도 공연히 재미있어 모으던 그 때의 철부지한 심사가 다시 그리워진다. 향기로운 라일락의 보라색 꽃잎이 떨어진 곳에서 어여쁜 인형의 옷을 만들 때가 그리워진다. 아침 Chapel 시간의 그 성스럽던 순간까지도 나는 영원히 버리고 떠나는구나. 저 끝없이 넓은 광야를 나는 달음박질해서 가야 되겠다. >우정은 건강과 같아서 그것을 잃게 될 때에 새삼 그 귀중함을 깨닫는다는 고언(古諺)과 같이 졸업은 박두하며 교문을 나서 제복을 벗을 생각을 하니 학교에 대한 애착심이 더 한층 새로워진다. 즐거운 것도! 괴로웠던 것도! 울고 웃었던 것도! 모두가 섞이고 조화되어 심원(心園)의 화폭(畫幅)이 되고 추억이라는 시(詩)가 되어 나의 기악 속에 뚜렷하고나, 그리고 몇 사람 안 되는 클라스메이트도 전보다 더욱 친절해지고 다정해지는 듯 싶다. 부드러운 바람 속에 이별의 애수가 숨어 온다. 나의 이별은 봄날의 화려한 애수이여! >나는 나의 일생을 내 자신의 안락만을 위하지 않고 의를 위하여 동포를 위하여 힘쓰리라고 나는 마음깊이 작정하였다. >그러면 나의 학창이여, 잘 있기를. >젊은 여인 하나 새벽길을 홀로 굳세게 걸어가리라. 일제의 말기적 발악이 광란하던 때에 자신의 안락이 아닌 “의를 위하여 동포를 위하여 힘쓰리라고 나는 마음 깊이 작정” 하는 용기 있는 결단이야말로 중앙보육학교의 교육정신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