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앙대학교/역사 (문단 편집) ===== 학원의 전시체제와 휴교 ===== 이른바 동아신질서(東亞新秩序)의 건설을 부르짖고 나선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더니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초기에 나치스 독일군이 우세를 보이자 미국, 영국에 전쟁을 선포하여(1941년 12월 8일) 대전을 일층 확대시켰다. 전쟁은 동남아시아로부터 태평양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일본의 한국 민족에 대한 물심 양면의 압박은 발악적이었다. 태평양전쟁 초기에는 한동안 기세를 올리던 일제도 미국의 본격적인 반격전 앞에 그들의 군국주의적 광열(狂熱)도 무색해져 갔다. 병력 부족을 메우기 위하여 일제는 학도지원병이란 이름으로 학생들을 강징하였고, 징병 제도를 실시하여 우리 청년들을 패색 짙은 전선으로 몰아 세웠다. 1941년부터는 교육 연한이 단축되었으며, 1943년 12월에는 ‘전시교육비상조치’ 로서 이공계 학교를 확충하고 법문계 학교를 감축하여 경성제대 이공학부는 정원의 50%, 경성고등공업학교는 정원이 배나 증가되었으며, 평양에 고등공업, 대구에 고등농업 등이 신설되었다. 각급 사립학교도 가중되는 탄압과 간섭으로 준 공립이 된 셈이며, 1943년 가을부터 남자 전문학교생과 대학생은 소위 학도지원병에 강제 ‘지원’ 을 당하였고,학교 교육은 사실상 종지부를 찍은 셈이었다. 태평양전쟁의 핍박 속에서도 임영신 교장의 자상하고도 굳센 지도 아래 평온하게 충실한 배움의 나날을 보내던 교직원/학생들에게 전기한 바와 같은 「전시 비상교육령」은 예기치 못한 일은 아니었으나 너무나 큰 타격이었다. 중앙보육이 ‘각종학교’ 로서 정비 대상이 되자 일본군 통신대에서 교사를 접수하려 하였으나 임영신 교장의 완강한 항거로 이를 물리칠 수 있었다. 중앙보육학교는 이른바 ‘전시교육' 나아가서는 ‘적전 교육’ 단계에 들어서자 각종학교로서 조만간 휴교 내지 폐교되어야 할 처지에 있었다. 일본군 사령부는 중앙보육의 위치와 시설이 통신 부대용으로 적합하다고 탐내고 또 교장이 조선인 여성임을 얕보았는지 교사 명도를 명령하고 접수 명령까지 파송하였다. 그러나 임 교장은 일본군의 총칼 앞에서 조금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학무국을 통하여 교섭하여도 교육 목적 외에 이 정성들인 교사를 내줄 수 없는데, 하물며 강압적인 요구는 절대로 수락할 수 없다고 꾸짖으며 나를 죽이기 전에는 한 발자국도 교사 안으로 못 들어간다고 결사의 기백으로 항거하여 강폭한 그들의 콧대를 꺾어 끝내 교사를 지켰다. 그러나 1944년도부터는 신입생 모집을 중단하였고, 1945년 3월에는 17회 졸업생 40명의 졸업과 함께 휴교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