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앙대학교/역사 (문단 편집) ===== 중앙보육학교의 인수 ===== 승당이 미국 유학 후, 귀국하여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하고 학교를 육성하던 시기는 일제가 중일전쟁(1937년 7월)과 태평양전쟁(1941년 12월)을 도발하여 아시아를 온통 전쟁의 와중에 휘말리게 했던 어려운 때이었다. 승당이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한 다음 해인 1936년에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는 그의 전임자인 우가키(宇垣一成) 총독이 포석한 황민화 정책을 계승하여, 이른바 국체명징(國體明徵), 선만일여(鮮滿一如), 교학진작(敎學振作), 농공병진(農工竝進), 서정쇄신(庶政刷新) 등의 5대 정강이라는 것을 시책의 방침으로 삼았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나타난 몇몇 실상을 보면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쳐야만 했고, 각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한 결과 이에 반대한 기독교계 학교들이 폐교당하였다. 중등학교에 현역 장교가 배속되어 군사교육이 실시되었으며, 하계 학생 계몽운동이 중단당하였고, 학교근로보국대(學校勤勞報國隊)[* 중일전쟁 후 일제가 조선인의 노동력을 수탈하기 위해 강제로 끌고 가서 만든 노역 조직이다. 1938∼1944년까지 약 762만 명이 강제 연행되었다.]가 조직되었으며, 조선학생정신연맹이 결성되었다. 또 학교 교원들과 관공리들은 제복을 입게 되었으며, 소위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을 전국민이 강요당하였다. 각급학교에서는 국체명징, 내선일체, 인고단련 등 소위 교육의 3대 강령을 실시해야만 하였으며, 학도정신대가 조직되어 근로동원이 실시되었다. 또 일제 총독부 정책에 비판적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되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승당은 중앙보육학교를 키워 나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서 귀국하여 YWCA 총무로 있으면서 승당은 그의 숙원인 학교를 세우기 위하여 먼저 땅을 샀다. 그 땅이 오늘의 중앙대학교 교지인 서울시 동작구 흑석동 221번지 일대이었다. 교지를 확보한 승당은 여자전문학교 설립 인가를 받기 위해서 동분서주하였다. 그러나 일제당국은 3.1 독립운동 때에 결사적으로 항일투쟁을 하였던 승당에게 학교 설립을 허가해 줄리가 없었다. 여자전문학교 설립 신청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허가가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금도 부족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승당은 때마침 경영난으로 부진한 상태에 있던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하게 되었다. 중앙보육학교는 앞에서 쓴 것처럼 중등학교인 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 입학하는 유치원 교사 양성의 여자전문학교에 해당하는 수업연한 2년의 ‘전문 정도 각종학교’ 이었다. 중앙보육학교의 전신은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146번지에 있던 중앙유치원에 1922년 9월 병설/설립된 중앙유치원 사범과이었다. 그 후 중앙유치원 사범과는 1928년 9월 5일부로 중앙보육학교로 전환하는 인가를 받았다. 승당이 인수하던 때의 중앙보육학교는 안팎으로 난관에 직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인수과정에 관해서 『중앙대학교 50년사』(1970)에서는 “창신동 교사에는 10명의 학생밖에 없어 늘 경영난이었고, 밖으로는 민족 진영의 분열을 노리는 일제와 그 주구의 농간도 있었고, 박희도 교장의 호방한 성품으로 말미암은 사생활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박 교장은 오랜 노력 끝에 유종의 미를 거두지도 못하고 교육계에서 은퇴할 것을 결심하고, 이 전통 있는 교육기관을 인수할 적임자를 찾고 있었다. 곡절 끝에 유명했던 이 여성교육 기관을 33세의 젊은 나이로 선생이 맡게 되었던 것이다.(1933년 3월)”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위의 글에서 인수 연월과 승당의 나이에 관한 기록이 잘못된 것 같다. 중앙보육학교의 설립자 변경인가서를 보면 김상돈 외 4명이 중앙보육학교의 설립자 변경을 1935년 6월 1일자로 신청하여 1935년 12월 13일자(학제 148호)로 조선총독 우가키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승당이 교장으로 취임하여 활동하기는 이보다 앞선 1935년 4월부터이었다. 즉 1935년 4월부터 중앙보육학교의 교사로 재직하였던 이영보의 앞의 회상문을 보면, >승당 임영신 이사장님을 처음 만난 때는 내가 동경(東京)에서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서 모교에 취임하던 날이다. 그 분의 계획인 첫 사업으로 경영난에 봉착해 있던 중앙보육학교를 인계 받으시고, 바로 1935년 4월 교장으로 취임하시는 날, 동경 동양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나온 그 분의 막내 여동생 임영선씨와 내가 같은 날 취임하게 되었다. 라고 써 있다. 또한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1922년에 개설된 중앙유치원 사범과는 … 장소 문제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1924년에는 … 학생이 37명에 이르렸으나 전용 공간이 없기 때문에 … 1924년 12월에 학생 24명이 교실과 교육과정의 개선을 요구하는 연판장을 낸 일도 있었다. 이 학교가 보육학교의 인가를 받자마자 정동 1번지의 8호의 교사로 이전하였다. 보육학교 인가 기준에 건물 요건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앙보육학교의 공동 설립자는 박희도, 장두현, 신태화, 김상돈이었다... 1934년 교장 박희도가 사임하고 차사백이 교장 대리로 취임하였으며, 운영은 황애시덕 3자매가 인수하였다. 1935년에는 다시 최초의 운영자 김상돈에게로 인계되고, 그 자제가 임영신에게 경영권을 인도하였다. 이에 따라 학교 건물도 정동에서 창신동으로, 그리고 서대문 피어선 성경학원으로 전전하였다. 그러나 새 인수자 임영신의 노력에 의해서 1938년 5월 2일 흑석동의 신교사로 안정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보육학교라는 독자적 고등교육기관으로 발족한 중앙보육학교가 전용 건물을 갖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도 하였지만 그로 인한 발전 또한 현저한 것이었다.[* 1924년 12월 7일~1938년 5월 2일 사이의 『동아일보』 기사 인용한 이상금, 『한국근대유치원교육사』,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87, 244~246쪽] 위의 여러 기록으로 보아 승당이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한 연월은 1935년 2~3월경이었을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