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앙대학교/역사 (문단 편집) ===== 학교 육성을 위한 노력 ===== 피어선 교사에서의 활기차고 안정되었던 학교 분위기도 잠시이었다. 건물을 비워 달라는 건물주의 요청에 시달려 승당은 자금도 준비되지 못한 채, 구입해 두었던 흑석동 교지에 1936년 11월 교사 신축의 주춧돌을 놓았다.[* [[파일:external/8b1d6709ade48ca1067894905a0768739f596a8736c4c807e209dbc74f843792.jpg]]] 자금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승당은 건축비를 부모형제에게 빌리기도 하였고, 유지들로부터의 기부금도 기대하였으나 그것도 일제 당국의 간섭으로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당시의 교사 신축에는 승당의 각고의 노력과 정성이 수반되었던 것 같다. 건축하는 데 승당 자신도 거친 잡역을 하여 승당의 “손바닥은 남자 노동자의 손과 같이 딱딱하게 못이 박히고 얼굴은 검붉게 타” 있었다. 건축비 조달이 막연하자 승당은 생각 끝에 미국에 가서 학교 건축비를 모금할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미국에 갈 여비가 없어 고민하고 있던 어느 날 뜻하지 않게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찾아와 미국에 가는 비용으로 써 달라고 하면서 저금통장을 내 놓았다. 승당은 통장 주인의 신원을 물어 보았지만 ‘홍금파 라는 이름의 소녀라는 사실밖에 알 수가 없었다. 승당이 학교 기금 조성을 위하며 미국에 간 것은 38세 때인 1937년 5월 중일전쟁이 일어나던 해이었다. 하와이에 도착한 승당은 이승만을 비롯한 민족 지도자를 만나 학교 경영의 어려운 처지를 설명하고, 또한 한국인 교회에 나가 민족교육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면서 교육 기금 조성에 협조해 줄 것을 적극적으로 호소하였다. 승당의 열띤 호소에 교포들은 감동하여 이국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와이에서만 4,000달러나 모금해 주었다. 한 노인은 자신의 장례 비용까지 선뜻 내놓았다. 이 기금들이 중앙보육학교 건축비로 충당되었음은 물론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모교인 남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총장인 폰 클라인스미드(Von Kleinsmid) 박사 내외와 여학생 처장인 크로포드 여사 등을 만났다. 총장 부인은 부유층 인사들을 소개해 주었고, 여학생 처장은 자선사업가와 자신의 친구들에게 소개장을 써 주었다. 모교의 관계자들에게는 그들 학교 출신의 동방의 이름 없는 식민지 출신의 처녀가 자기들처럼 교육 사업에 정열을 쏟고 있는 모습에 동정과 함께 대견스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기금 모금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은 승당은 미국의 동부로 향하였다. 뉴욕에서는 국제적으로 이름난 자선사업가인 제시 암스트롱(Gessie W. Armstrong) 부인을 찾아갔다. 때마침 승당은 중앙보육학교로부터 "건축업자에게 줄 6,000달러를 급히 송금해 달라"는 전보를 받고 있었는데, 그 전보를 본 암스트롱 부인은 즉석에서 1,000달러를 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친구들에게도 부탁하여 5,000달러를 마련하여 주어 중앙보육학교는 그 돈으로 어려운 사정을 면할 수 있었다. 뉴욕에서는 한국에서 이미 널리 알려진 자선사업가인 애니 파이퍼 부인도 만났다. 파이퍼 여사는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사 신축비와 학교 기념 사업비 등에 기금을 기부한 바 있었다. 1937년 7월 파이퍼 부인을 찾아간 승당은 서울에서 갖고 간 교사 건축 계획 자료와 미국 각지에서 도와 준 기부금 명세서 그리고 전주기전여학교 시절부터의 자신의 행적 등에 관해서 무려 4시간이나 걸쳐 설명하였다. 파이퍼 부인은 승당이 항일 투쟁으로 옥고를 치른 일에 특히 관심을 표하고 그 용기를 찬양하였으며, 친딸처럼 여기면서 우선 교사 건축을 완성하라고 37,000달러를 희사하고, 앞으로 기숙사와 유치원의 건축을 위해서도 원조해줄 것을 약속하였다. 파이퍼 여사를 만난 것은 승당과 중앙보육학교로서는 큰 행운이었던 것이다. 승당은 또 사회사업가이며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 루즈벨트(Eleanor Roosevelt) 여사를 만났다. 승당의 교육사업을 들은 루즈벨트 대통령 부인은 커다란 호의를 보이면서 한국과 승당을 소개하고 승당의 모금을 지원하여 주기를 바라는 다음과 같은 신문 칼럼을 썼다. >내가 뉴욕을 떠나기 전에 나는 임영신 양과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임양은 코리아에서 온 매력적인 여성이고 현재 한국에서 여성들을 교육하는 학교의 경영자입니다. 임양은 한국에서 한때 사립학교 교육이 활발하였으나 그래도 여성의 8할이 문맹이고, 그녀들은 매우 아름다운 수공품을 만들 수 있는데 교육을 받을 길이 없어서 직장이나 전문적인 직업을 가질 수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녀의 목적은 바로 이러한 한국 여성에게 교육을 주는 데 있으며, 그리하여 임양은 교육과 극동에 관심 있는 미국인으로부터 도움을 얻기 위하여 미국에 온 것입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의 학교 교육에 대하여 관심 있는 사람은 많으나 한국에 대해서 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나는 한국어가 중국어나 일본어와 아주 다른지조차 잘 모르는데 임양은 나에게 새롭고도 흥미 있는 많은 한국의 역사 이야기를 하여 주었으며, 그녀의 개성은 나를 감동시켰습니다. 나는 많은 미국인이 그녀와 한국인에 관해서 이야기하기를 바랍니다. 지난 4월부터 미국에 와 있는 임양은 귀국에 앞서 그녀의 학교를 위하여 20만 달러가 모금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세계 기독교운동연구부, 『연구평론보』 제6호] 이상과 같은 1937년 8월 21일자 뉴욕 『월드 텔레그램 (World-Telegram)』에 기고된 루즈벨트 대통령 부인의 칼럼은 미국 조야에 큰 반향을 일으켜 록펠러(John D. Rockfeller) 2세, 자동차왕 포오드(Henry Ford), 발명가 에디슨(Thomas Edison) 부처 등으로부터 많은 후원금을 받았다. 승당의 노력은 결실을 거두어, 1938년 10월에 파이퍼 여사는 중앙보육학교를 후원하기 위하여 30만 달러를 쾌척하여 재미국 중앙보육학교 후원재단인 애니 머너 파이퍼 재단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재단 이사장에 파이퍼 여사가, 부이사장에 승당이 각각 취임하였다. 이로써 중앙보육학교는 새 교사와 유치원 그리고 기숙사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D%8C%8C%EC%9D%B4%ED%8D%BC%EC%97%AC%EC%82%AC%28%EC%9E%91%EC%9D%80%EC%82%AC%EC%A7%84%29.jpg]] '''파이퍼 여사(Annie Merner Pfeiffer)''' 이 때 건축한 교사가 현재의 영신관(永信館)이며, 건축 당시의 3층 석조 건물을 뒷날 증축하여 그 높이를 높이었다. 승당은 학교가 중앙대학교로 발전한 뒤에 파이퍼 여사를 기념하기 위해서 파이퍼 홀(Annie Merner Pfeiffer and Gustavus and Louise Pfeiffer Memorial Hall)을 세웠다. 파이퍼 홀에는 파이퍼 여사의 사진과 함께 "평생 동안 인류에게 봉사한 위대한 인도주의자이자 박애주의자였으며, 1937년 이래 중앙대학교의 크나큰 후원자였던 애니 머너 파이퍼 (1860~1944) 여사” 라는 영문글이 새겨진 동판이 부착되어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C%A4%91%EC%95%99%EB%8C%80%ED%95%99%EA%B5%90_1937%EB%85%84%2C_%EC%99%84%EA%B3%B5_%EB%8B%B9%EC%8B%9C%EC%9D%98_%EC%98%81%EC%8B%A0%EA%B4%80.jpg]] '''1937년 완공당시의 영신관''' 승당이 미국에서 학교 기금 조성을 위해서 활동하는 동안 중앙보육학교는 1937년 12월에 교사를 준공하였고, 1938년 5월 2일에 서대문의 피어선 성경학원을 떠나 흑석동의 새 교사로 이전하였다. 오랫동안 정동에서 창신동으로 그리고 서대문으로 전전하던 중앙보육학교는 비로소 안정을 찾게 되었다. 학교 이전에 관한 공식 기록은 1938년 5월 16일자로 조선총독부에 학교 위치 변경에 관한 신청을 하였고, 1938년 7월 6일자로 학제 148호로 이전이 인가된 것으로 되어 있다. 흑석동으로의 중앙보육학교 이전은 학교 관계자뿐만 아니라 각계의 관심사이기도 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흑석동의 중앙보육학교 교사를 방문하였던 『조선일보』 기자는 당시의 학교 모습과 승당의 활약상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전차로 서울역을 지난 다음부터는 주위가 조용하여 여유가 있어 보이며,흑석동의 마루터기를 넘어서서 명수대 이름 그대로 물소리가 졸졸 울리며 빨래하는 표모의 방망이 소리가 조용한 마을에 울리고 있다. 졸업은 섭섭하고도 기쁜 일이라고 말하는 졸업반 학생들은 "오로지 조선 여자의 손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중앙보육학교가 자랑해 마지 않는 바" 라고 입을 모은다. 노래도 춤도 공부도 고스란히 어린이들에게 바치겠다는 학생들의 입은 유니폼도 키가 큰 아가씨가 입었어도 어린이 같은 귀여운 느낌을 주는 것이었으며 … 그녀들이 교문을 나온 후 직장에서 어린이들과 같이 지낼 때도 입을수 있도록 연구를 거듭하여 고안한 것이라 한다. 졸업생마다 장기가 있어 시와 수필, 노래, 피아노, 스케이트, 탁구, 정구 등에 저마다 솜씨가 있다는 것이다. 한적하고 이름다운 환경 명수대 교사에서 소요하는 학생들을 보면 지상낙원의 아가씨들 같다.[* 『조선일보』1940년 2월 16일자] 위의 글에서 신축 교사에 대한 은근한 자랑과 기쁨, ‘의’ 와 ‘참’ 을 강조한 중앙보육학교의 교육 정신과, “오로지 조선 여자 혼자의 손으로 만들어 놓은” 중앙보육학교 임영신 교장에 대한 신뢰, 한국의 유구한 역사를 유유히 그리고 면면히 흐르는 한강에 비유한 나라 사랑과 자부심, 의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 나라의 장래를 짊어질 어린이 교육에 충실함으로써 조국의 영광에 헌신하겠다는 각오를 그토록 가혹하였던 일제의 탄압하에서도 당당하게 피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위의 글이 발표된, 가혹하였던 1938년 내지 1940년 전후의 시대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감히 이 시기에 ‘의’ 를 내세우고, ‘조국’ 을 내세우고, ‘우리 겨레’ 를 내세우는 등의 일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하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날로 가혹하고 살벌해져 가는 일제 식민지 전제정치하에서 비록 직절적(直截的)으로 표현을 못하였을지언정 한강의 흐름에 비유하여 유구면면한 한국의 역사를 인식하였고, ‘의’ 를 위하여, ‘동포’ 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 나라의 장래를 짊어질 어린이에게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다짐하는 학 생들의 깨달음과 각오는 임영신 교장과 중앙보육학교가 교육정신을 ‘의’ 와 ‘참’ 에 두고 교육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