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앙대학교/역사 (문단 편집) ===== 한국전쟁의 발발과 휴교/전시연합대학 ===== 중앙대학이 최초의 학사를 배출한 1950년은 민족적으로 매우 비극적인 해이었다. 이 해 6월 25일,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민족상잔의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던 것이다. 중앙대학은 5월 18일 제1희 학사학위 수여식의 감격을 안고 더욱 좋은 대학으로 발전할 것을 기약하며 6월 10일 입학식과 개학식을 거행하였다. 학년 초가 6월이 된 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교육법 제정에 따른 과도적 조치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학한 지 약 2주일 후인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북한군은 38선을넘어 남침하여 왔다. 국군은 북한군의 불의의 습격에 미처 반격 태세를 갖출 겨를도 없었으며, 병력과 장비 면에서도 북한군에 비해 현저히 뒤지고 있었다. 전세는 불리하여 이미 6월 26일 밤에는 의정부가 점령당하고 말았다. 북한군은 남하를 계속하여 6월 28일 아침에는 서울을 점령하였고, 6월 30일에는 한강의 방위선이 무너졌다. 7월 4일에는 수원이 점령되었으며 7월 20일에는 대전이 함락되었고, 그리하여 8월 3일에는 서쪽은 낙동강까지 후퇴하였고, 남쪽은 진주 동쪽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한편 중앙대학은 6월 25일에도 평소와 다름 없이 몇몇 당직자들이 학교를 보살폈고, 그 다음날에는 약간의 불안이 감도는 가운데서도 정상 수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6월 27일에는 전세가 더욱 급박해져서 포성이 요란하게 들리고 서울 상공에서는 적의 야아크기와 아군기간에 공중전이 벌어지고, 격추된 적기에서 낙하산으로 탈출한 북한군 비행사가 명수대에 낙하하여 엠불런스에 실려가는 등 긴박한 사태가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경찰은 한강 인도교에서 서울로 들어가지 못하게 교통을 차단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태를 보고 중앙대학 당국은 6월 27일에 긴급 교수회의를 개최하여 무기 휴교를 결정하였다. 운동장에 전교생을 집합시켜 무기 휴교를 발표하고, 교직원들에게는 2개월 분의 봉급을 선불하였다. 학생과 교수들은 언제 다시 만난다는 분명한 약속도 없이 제각기 피난길에 올랐다. 희망에 찬 내일을 바라보며 비약을 거듭하던 중앙 가족에게는 뜻하지 아니한 타격이 갑자기 닥쳐온 것이다. 학생과 교수는 고향으로 또는 군(軍)으로, 또는 대구나 부산으로 제각기 갈 길을 찾아 무거운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전국(戰局)은 한때 암담하였으나, 약 3개월이 지나서 UN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북한군이 남침하자 UN총회는 이 침략을 저지하기 위하여 UN군을 편성해서 한국 전선에 급파하였기 때문에, 낙동강까지 후퇴하였던 국군은 UN군과 협동하여 다시 북상을 시작하였다. 9월 15일에는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북한군을 양단(兩斷)하고 수도 탈환 작전에 돌입하였다. 이와 같은 국군과 UN군의 반격으로 전세는 일변하였고, 서울이 수복된 것은 9월 28일이었다. 9.28 수복 후 피난갔던 중앙대학의 교직원들은 대부분 다시 서울에 돌아왔다. 그러나 이 때는 중앙대학에 미 육군의 제8군 수송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래서 강의실은 갖지 못하였으나 개교하며 학생들의 재등록을 받는 한편, 본관에 있던 모든 서류와 비품 등을 별관에 옮겨 보관하였다. 9.28 수복 후에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던 국군과 UN군은 1950년 11월 26일 인해전술로 밀어닥치는 중공군의 침입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으며 부득이 다시 후퇴하였다. 1951년 1월 3일 UN군은 다시 서울을 철수하고, 정부도 같은 날 후퇴하였으며, 북한군은 4일에 다시 서울을 점령하였다. 이에 9.28 수복으로 서울에 돌아왔던 중앙 가족들도 두 번째 피난길을 떠나야만 하였다. 일반 교통편이 끊긴 1월 4일 전선에서 울려오는 포성을 들으면서도 당시의 교무과장 이여진(李如眞)교수는, 학생이면서도 교무의 일을 돕고 있던 강인덕(康仁德)과 서무 직원이었던 송해일(宋海一)의 협조하에 학적부를 비롯한 학교의 서류를 사과 궤짝에 담아 묶고 두 사람의 짐꾼을 동원하여 상도동을 거쳐 영등포역까지 옮겨 갔다. 전쟁으로 인하여 학교 서류의 일체를 잃어 버린 대학도 많았으나, 중앙대학은 교무/서무/학생/재단에 관한 모든 서류들을, 위험을 무릅쓰고 직책에 충실하였던 교직원 몇 사람의 노력으로 무사히 보존할 수 있었다. 1.4 후퇴의 쓰라린 경험을 거울 삼아 전열을 정비하던 국군은 1951년 1월 중순부터 반격을 개시하여 3월에는 또 다시 38선을 돌파하였다. 이에 소련은 UN에 휴전안을 제의하였다. 휴전의 성립은 곧 민족분단의 영구화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 비참한 전쟁에 바쳐진 모든 희생의 의의를 흐리게 하는 것이었으므로, 우리 정부는 시종일관하여 휴전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우리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섭은 미군이 당사자가 되어 지루하게 끌었으며, 그 조속한 타결의 전망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문교부는 장기전에 대비하는 비상교육정책을 세우게 되었다. 1951년 1월 7일 문교부는 부산시청을 임시 사무처로 정하고, 같은 해 2월 26일자로「전시하 교육 특별조치 요강」(戰時下敎育特別措置要綱)을 제정/발표하여, 그 동안 중단되었던 수업을 재개할 것을 시달하였다. 피난 중인 국민학교와 중/고등학교의 학생은 피난지의 학교에 등록하여 수업을 계속할 것과 임시로 피난 특설 학교를 설치하여 수업을 재개하라는 것이 이 요강의 골자이었다. 그러나 대학은 초/중/고등학교와는 달리 상당한 시설과 교수를 필요로 하므로, 피난 초기에는 그 재개가 불가능한 상태이었다. 그런데도 문교부는 1951년 5월 4일 문교부령 제19호 「대학 교육에 관한 전시 특별조치령」을 공포하여 전시연합대학(戰時聯슴大學)을 설치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먼저 부산에서 발족하여 점차로 전주/광주/대전의 4개 도시에 전시연합대학을 설치하고, 그 지방에 피난하고 있는 각 대학의 학생을 모아 4월부터 수업을 개시하였다.(후에 청주/대구에서도 추가설립됨) 이 전시연합대학은 세계 교육사상에 전례가 없을 뿐 아니라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6,500여 명의 대학생이 수강하였다는 사실은 이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때 중앙대학의 학생 중에서도 상당수가 새로 설치된 전시연합대학과 기타 동등의 교육기관에서 수강하게 되었다. 이 전시연합대학은 후에 각 대학이 독자적으로 개교함에 따라 약 1년간 계속하다가 폐지되었지만, 각 대학의 학생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지낸 것도 전쟁 기간 동안 잊기 어려운 한 토막의 추억 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