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앙대학교/역사 (문단 편집) ===== 중앙유치원의 개원 ===== 우리나라에서 [[유치원]]은 1887년 부산에 일본인이 세워 일본 거류민의 아동들을 가르친 사립유치원이 그 효시이다. 조선인 원아(園兒)를 교육하는 첫 유치원은 1913년 3월에 설립된 경성유치원이었으며, 1914년 이화학당 안에 이화유치원이 설립되었다. 경성유치원은 자작(子爵) 조중응과 기타 친일 실업가들이 설립한 교육기관이었다. 원장과 보모(保姆)로는 일본인을 고용하여 일본어 교육과 일본의 풍습, 습관 등을 가르치는 것에 치중하였다. 일본인 보모의 임무는 일본의 풍습과 습관을 가르쳐 장차 원아들을 "상당한 신사숙녀가 되도록" 힘쓰는 것이었다. 또 원아는 창설자의 자손에 한하며 창설자는 기금으로 100원 이상을 기부하고, 원아의 1개월 보육료는 2원으로 하는 등 특수층이 아니고서는 부담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이러한 교육 노선은 우리가 지향하는 어린이 교육과는 그 성질이 판이한 것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요컨대 이 유치원은 일종의 귀족 유치원으로서, 이른바 동화교육을 위한 본보기 교육기관으로서 설립된 것이었다. 이화유치원은 1914년 1월 이화학당 당장 미스 프라이(Frey, Lulu E.)를 원장으로 하여 손탁호텔(Sontag Hotel)의 한 방에서 개원하였다. 이때 원아는 16명이었고, 교육은 교사 브라운 리(Brownlee Charlotte Georgia)와 한국인 조수 조애리시(趙愛理施)가 담당하였다. 이 유치원은 이화학당이 초등교육에서 고등교육에 이르는 완벽한 여성교육기관을 설립하려고 한 계획의 일환으로 설립되었으며, 미국 여성 선교사들에 의하여 운영되었다. 그러므로 이 유치원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종교교육 기관이었으며, 민족적 자각에 의하여 한국인이 설립한 유치원이라고 볼 수는 없다. 반면 중앙유치원은 그 설립 과정과 정신이 이들 유치원과는 매우 달랐다. 『매일신보(每日申報)』 1916년 10월 11일자에는 "중앙(中央)에 유치원(幼稚園)이 생긴다 : 경성의 중앙되는 인사동에 유치원이 생기어 어떠한 집 아이든지 환영한다"는 표제 기사로 중앙유치원의 설립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이는 중앙대학교의 창립과 관계되는 매우 중요한 기사이므로 당시의 신문 보도를 그대로 인용해 본다(고어를 현대어로 고치었음).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B%A7%A4%EC%9D%BC%EC%8B%A0%EB%B3%B4_1916%EB%85%84_10%EC%9B%94_11%EC%9D%BC.jpg]] >우리 조선에도 교육기관이 점점 발달되어 보통학교와 중학교는 물론이요 전문교육에 이르러서도 목하의 급무되는 몇 학교가 설치되었음은 치하할만한 일이라, 그러하나 교육의 근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유치원의 설치가 없음은 유감이라. >경성에는 경성유치원이 있기는 있으나 이는 귀족유치원이라고도 할 만한 곳이 되어 중류 이하 가정의 자녀는 보내기 어렵고 또 보낼 만한 가정의 자녀라도 그 유치원에는 정원이 있은즉 옹이히 들여보내기 어려운 터이라. 교육에 뜻있는 사람들은 수년 전부터 일반 가정의 자녀가 입학할만한 유치원이 설립되기를 바라던 바 요전에 지방학생들을 위하여 안국동에다 육영사(育英舍)라 하는 기숙사를 만들고 지금 사감으로 있어 전력하는 영신학교 교감 [[박희도(1889)|박희도]](朴熙道)씨와 중앙예배당 목사 장락도(張樂道)씨와 유양호(柳養浩)씨 등 세 씨가 협력하여 요사이 인사동 246번지 영신학교 분교실 안에다 정동유치원의 분교실로 유치원을 실시하게 되었더라. 여기서 경성유치원과 대비시켜 설명함에 있어서 더욱 분명하듯이, 중앙유치원이 우리 민족 자제들에게 유치원 교육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중류층과 중류층 이하의 자녀를 교육 대상으로 하여 설립되었음을 보여 준다. 다소 뒤의 자료이지만 1921년 5월에 중앙유치원을 따로 건설하자는 계획을 추진하면서, 중앙유치원 간부회에서는 이병조(李秉祚), 홍병선(洪秉璇), 심명섭(沈明燮) 3인을 유치원 확장 기성 회원으로 추천하고 "제삼국민의 앞길을 장래의 조선을 위하여 잘 일하고 잘 싸울 용사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설치할 작정"이라고 표방하였다.[* 『동아일보』 1921년 5월 23일자] 이는 앞의 경성유치원과 달리 중앙유치원이 중산층의 자녀를 교육대상으로, 우리나라에 중산층의 양성을 교육목적으로 설정하였음을 뜻한다. 그리하여 중앙유치원의 창원 정신은 기독교의 민족 운동 정신에 입각하여 우리나라를 위할 줄 아는 참된 우리나라 어린이를 키우는 데에 있었다고 집약할 수 있다. 즉 "장래의 조선을 위하여 잘 일하고 잘 싸울 용사를 양성하는 기관"을 세워 "제삼국민의 앞길을 열어 줌"을 목적으로 하며, "취미 있는 방법, 쉬운 교육과정, 부드러운 사랑으로" 원아들을 가르치며, '규칙적인 유치원 생활'을 통해 원아들을 건실한 사회인으로 양성하는 것이 그 창원 정신이었다. 중앙유치원은 [[정동교회]] 부속 유치원의 분원으로 1916년 9월 20일 개원하였으며, 원아는 25명이었다. 원장은 정동유치원 원장 미스 프라이가 겸하였고, 그 대리로 미스 브라운리가 근무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설립과 경영의 주체는 아니었고, 그 주체는 [[박희도(1889)|박희도]], 장락도, 유양호 세 사람이었다. 원장 대리 미스 브라운리는 매일 와서 백남신(白南信), 장필순(張弼順) 두 여교사와 함께 어린이들을 가르쳤는데, 이들의 열성은 보육 사업의 전도에 많은 희망을 품게 하였다. 이와 같이 유치원 본래의 사명에서 떠나지 않고, 또 사회가 요청하는 창원 정신에서 중앙유치원이 창립되고 성장하였기 때문에 중앙유치원은 우리나라 어린이 교육에서 불후의 공적을 남길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