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앙대학교/역사 (문단 편집) ===== 중앙대학교의 설립 ===== 중앙대학이 정당한 근거를 제시하며 중앙교육위원회의 재소집을 끈질기게 요구한 결과, 1953년 2월 28일 오전 11시 중앙대학교의 설립 인가 문제를 재심의하기 위하여 문교부 회의실에서 중앙교육위원회가 다시 개최되었다. 임영신 학장을 비롯하여 김태오 부학장, 여러 교수, 직원, 학생들이 방청하는 가운데 진행된 이 회의는 약 30분간의 심의를 거쳐 중앙대학교의 설립 인가를 별다른 이의 없이 결의하였다. 이 때 인가된 내용은 1952년 3월 8일 중앙대학 긴급 이사회 에서 결의한 원안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것이었다. 위의 인가 내용 중 이사회가 결의한 원안과 달라진 것은, 교육대학을 없애는 대신 이에 소속시켰던 교육학과. 심리학과를 문과대학에 편입시키고, 문과대학의 철학과, 사학과와 법정대학의 신문학과를 삭제한 점이다. 정원도 원안에서는 총 1,840명을 요청하였는데 383명이 삭감되어 1,460명만인가되었다. 대망하던 종합대학교 설립이 인가되자 중앙대학은 촌각이라도 아껴 써야 할 분망한 시기를 맞이하였다. 중앙대학이 명실공히 명문의 종합대학교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학교의 기구, 시설 등 각 부문에서 전면적 개편과 확장을 서둘러 조직적인 학사행정과 계획성 있는 학교운영 체계를 시급히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1953년 2월 재단법인 중앙문화학원 이사회는 만장일치로 임영신 학장을 초대 총장으로 선출하였다. 임영신 총장은 중앙대학교의 비약적인 발전을 기약하며 취임하였고, 부총장으로는 김태오 부학장이 취임하였다. 이와 동시에 학교운영의 기본 원칙이 될 학칙도 종합대학교로서의 면모에 손색이 없도록 전면 개정하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C%A4%91%EC%95%99%EB%8C%80%ED%95%99%EA%B5%90_1954%EB%85%84%2C_%EA%B5%90%EC%82%AC%EB%B0%98%ED%99%98%EC%8B%9D.jpg]] '''1954년, 교사 반환식''' 중앙대학교는 환도 이후 UN군으로부터 교사를 인수한 뒤 점차 정상화되었고, 시설의 확충을 비롯한 교육의 내실화를 다져 나가면서 종합대학교로서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 때 많은 학과를 신설 또는 개편하였는데, 이를 연도별로 정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954년 1월 26일 문과대학에 철학과(정원 100명)/물리학과(120명)/화학과(120명)/생물학과(120명)를 신설하였으며, 국문학과를 국어국문학과, 영문학과를 영어영문학과로 개편하였다. 이와 같이 학과를 신설/개편함에 따라 문과대학을 문리과대학으로 개편하는 한편, 학부제도를 채택하여 국어국문학과/영어영문학과/교육학과/심리학과/철학과의 5개 학과를 문학부에, 물리학과/화학과/생물학과의 3개 학과를 이학부에 소속시켰다. >1955년 4월 1일에는 문리과대학 이학부에 수학과(정원 140명)를 증설하고 물리학과/생물학과/화학과의 정원을 각 5명씩 증원하였다. 수학과를 증설함에 따라 종래 3개 학과이었던 문리과대학 이학부는 4개 학과로 늘어났다. >1957년 1월 16일 법정대학에 행정학과(정원 160명)를 신설하고, 정치학과를 정치외교학과로 개편하였으며, 경상대학에 경영학과(정원 160명)를 증설하였다. >1958년 3월 31일에 문리과대학 문학부에 사학과(정원 120명)를 신설하고, 같은 해 1월 8일에는 법정대학에 신문학과(200명)를 증설하였다. >1959년 2월 1일에는 문리과대학 문학부에 연극영화학과(정원 120명)와 보육학과(120명)를 증설하였다. 이와 같이 중앙대학교는 종합대학교로 발족한 이후 만 6년만에 11개의 학과를 신설하여 4개 대학 19개 학과의 규모로 발전하였으며, 정원도 2,850명으로 늘어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