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앙대학교/역사 (문단 편집) ===== 1960년 4.19 혁명과 중앙대학교 =====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정권은 1950년 [[국민방위군 사건]], 1951년의 [[거창 양민 학살사건]], 1952년의 5.26정치 파동과 [[발췌 개헌]],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 1955년의 [[대구 매일신문 테러 사건]], 1958년의 보안법 파동, 그리고 1960년의 [[3.15 부정선거]] 등 한국 현대사에 굵직굵직한 부정부패 사건을 일으키며 권력을 유지하였다. 당시 임영신 총장은 3.15 부정선거에 부통령 후보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방송을 통해서 이렇게 털어놓았다. >낙선한 사람으로서의 변이란 나에게는 지극히 어려운 테마가 아닐 수 없읍니다. 말을 제대로 하려면 태산도 부족이요 입을 다물려면 백지로 돌아 갈 수 밖에 없읍니다. 그러나 방송국의 간청에 저바릴 수 없어 느낀바를 조용히 말해 보려고 합니다... (중략) >... 소위 이대통령을 보필한다는 몇몇 정상간신도배(政商奸臣徒輩)들이 그의 총명을 완전히 가리워 놓고 또한 그를 철의 장막이란 도가니 속으로 완전히 몰아 넣고야 말았읍니다. 이 악질적인 정상배들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제각기 이대통령을 등에 업고 자기네들의 생명 연장과 부귀 영화의 계속을 위해서는 민족에 대한 생각은 추호도 염두에 두지 않고 양 같이 순한 민족임을 기화로 하여 입으로 형용할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는 악행과 만행을 자행하여 이대통령의 숭고하고 거룩한 정신을 망각하여 왔으므로 오늘날 이대통령만이 만(萬) 인간 앞에 원성을 독차지 하게 되었음을 어찌 슬퍼하지 않겠읍니까? 진실로 천인이 같이 통곡할 일이라 하겠읍니다....(중략) >...일예를 들면 내가 운영하고 있는 중앙대학교 소재지인 서울 시내 흑석동에는 동민 태반이 우리 학교에 종사하는 직원이요, 나의 친척이 살고 있는 특수한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표함을 열고 발표한 것을 보면 가엾게도 한표도 나오지 않았읍니다. 이 얼마나 요절하도록 웃으운 일이냐는 말입니다. 이것만으로도 나의 낙선을 전 국민이 알 수 있을 것이며 이번 선거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으로 믿는 바이므로 이상 더 말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임영신, 「천인(天人)이 통곡(痛哭)할 3.15 망국선거(亡國選擧)」, 1960.3.15 낙선의 변] 1960년 2월 28일 일요일 등교 지시에 대한 경북고등학생들의 항거는 3.15 마산항쟁으로 이어졌으며,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바다 위로 떠오르면서 제2차 마산항쟁이 촉발되었다. 이어 '4.18 고대 시위' 는 2월 28일 이래의 학생 시위의 주역을 지방 고등학생에서 서울의 대학생으로 바꾸어 놓았고, 정권에 도전하는 '대(對)사회투쟁' 으로 발전하였다. 고대생들의 시위가 반공청년단 종로구단 동대문 특별단부소속 단원인 정치깡패들에게 습격받자, 며칠 전부터 준비해 오던 각 대학의 시위 계획은 앞당겨졌다. 4월 19일 셋째 시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중앙대학교 학생들은 운동장에 모여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낭독하고 임영신 총장과 학생회 간부의 만류를 뿌리치고 일제히 스크럼을 짜고 교문을 나섰다. >우리 중대생이 자유당 정권의 폭정을 규탄하는 것은 기성세대의 파렴치한 유산을 물려 받지 않으려는 젊은 세대의 정당한 저항이며 총칼의 탄압에는 굴하지 않고 감행되어야 할 이 항쟁은 우리의 후손에게 민주주의를 말살하려는 광적인 장기집권이 가져다 준 부정과 부패의 무서운 해독을 오염시키지 않으려 함에 있다.(후략) 우리학교 시위대는 애국가와 교가 및 전우가, 학도호국단가 등을 부르며 교시인 '의에 죽고참에 살자'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마산학생 석방하라", "불법폭정 바로잡아 민주구국 선봉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흑석동 고개와 한강대교 전면 2차에 걸친 약 40여 명의 경찰대와 소방차 4대의 살수세례를 뚫고 한강 인도교를 지나 삼각지 서울역을 거쳐 시청앞에 이르렀다. [[파일:external/fe359cbe93e8442b48d53405ff22da5db6539f04bec6356c4bdf4148401b42af.jpg]] '''1960년, 4.19 혁명 당시 내무부 앞 연좌시위''' 경무대 앞에서의 경찰 사격으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자, 오후 3시경 시위대는 다시 국회의사당과 시청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안국동과 종로 을지로를 가로질러 남산을 돌아 다시 소공동쪽으로 향했다. 이어 시위대는 미도파 앞을거쳐 보사부 앞에서 경찰과 충돌하여 격렬한 투석전을 벌이면서 내무부 앞에서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이때가 6시경이었다. "내무부장관은 우리들 앞에 나타나 3 • 15 협잡내막을 보고하라", "살인경찰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던 상황에서 경찰들의 일제사격이 시작되었다. 당시 현장에서 연행되어 고문후유증으로 7월 2일 사망한 서현무(법학 3)의 수기에는 그날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중대 데모대가 내무부 앞에 도달했을 때 경관들은 우리들에게 정면으로 총뿌리를 대었다. 더 이상앞으로 나갈 것을 단념한 데모대는 10미터 간격을 두고 앉아서 농성을 시작했다 …(중 략 ) …한학생이 태극기를펴들고, "이 태극기는 대한민국의 태극기이며 한국민의 태극기이며 여기서 총을 겨누는 자는 반역자다." 라고 외쳤으나 경관들은 쏠 기세였다. 그때 뒤쪽(시청쪽)에서 발포를 시작하여 점점 가까이 들리자 우리를 경비하던 경관들도 별안간 발포하기 시작했다 …(중략)…총탄 하나가 바로 손끝에와 떨어짐을 느낀 나는 얼른 손을 오무리고 꼼짝을 않고 있었다. 바로 그때 누구인가 머리채를 휘어잡기에 고개를 들려하니 "이 깜찍한 년이 달아나지도 않아!" 하며 총대로 목덜미를 내려치지 않는가. 순간 나는 앗질함과 머리속에 어떤 뜨거운 액체가 하나가득 흐르는 듯함을 느꼈다.(후략) 중앙대학교는 4 • 19혁명과 관련하여 6명의 꽃다운 청춘을 민주의 제단에 바쳤다. 이들은 수유리 4.19국립묘지에 모셔졌다. 이들의 이름과 간단한 약력은 다음과 같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21px-%EC%A4%91%EC%95%99%EB%8C%80_6%EC%9D%B8_%EC%97%B4%EC%82%AC.jpg]] '''(좌에서 우로)첫째줄 : 고병래, 김태년, 서현무 / 둘째줄 : 지영헌, 송규석, 전무영''' >고병래(당시 22세, 상학과 3) : 충남 금산군 금산읍 상옥리 출생. 대전중고교 졸업. 4.19때 내무부 앞에서 희생되었음. >김태년(당시 24세, 약학 3) : 충북 음성군 출생. 청주고교 졸업. 평소 문학에 취미가 있었음. 4.19 당일 녹음기로 치안국 무기고 앞의 시위상황을 녹음하다가 희생되었음. >서현무(당시 24세, 법학 3) : 경기도 용인군 고삼면 월향리 출생으로 신광여고 졸업. 4.19 시위 당시 플래카드를 들고 선봉에 섰으며, 학생시위대의 협상대표로 내무부장관과의 면담을 요청했었음. 경찰에 연행되어 이틀 동안 심한 고문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7월 2일 수도의대부속병원에서 영면함. 그는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사월혁명 부상학생동지회 부회장과 사업부장을 역임함.[* 『동아일보』 1960년 7월 3일자에 '쓸쓸히 진 혁명의 꽃' 으로 한면에 걸친 기사 게재됨.] >지영헌(당시 21세, 신문 3) : 충북 단양군 매포면 하시리 출생. 외아들로 태어나 단양고교 졸업. 4.19 당일 내무부 앞에서 희생당하였음. >송규석 (당시 24세, 정외 3) : 전남 고홍군 과역면 석봉리 출생. 순천고교 졸업후 국민학교 교사로 봉직중 1958년 본교 진학. 내무부 앞에서 마지막까지 싸우다 총탄을 맞고 택시에 실려갔는데 정롱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음. >전무영(당시 21세, 신문 1) : 경남 김해군 이북면 장방리 출생. 진해고교 졸업하고 본교 입학한 신입생으로 재학한지 불과 18일만에 내무부 앞에서 희생당했음. '피의 화요일'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186명이 사망하고 6,0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는데, 중앙대학교는 서울대 7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또한 중앙대학교는 4월 19일 당시 대학들 가운데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최후 세력' 이었다. 그로부터 1주일이 지난 4월 25일에도 이승만과 자유당은 이기붕을 퇴진시키는 정도에서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다. 바로 이날 오후 전국 27개 대학의 교수 약 300명은 계엄령하에도 불구하고 시위에 돌입하였다. 오후 7시경 국회의사당 앞에서 교수들은 선언문을 다시 한 번 낭독하고 만세삼창과 애국가를 부르고 해산하였다. 4월 26일 10만이 넘는 시위군중이 세종로를 메우면서 경무대로 육박해 들어가는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5월 10일, 중앙대학교는 임영신 총장을 비롯한 교직원, 전 학생이 모여 운동장에서 4. 19 희생자에 대한 합동추모식을 거행하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C%A4%91%EC%95%99%EB%8C%80%ED%95%99%EA%B5%90_1960%EB%85%84%2C_4.19_%ED%98%81%EB%AA%85_%ED%9B%84_%EC%B6%94%EB%AA%A8%EC%8B%9D.jpg]] '''1960년, 4.19 혁명 희생자 합동추모식'''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60_%EC%9E%84%EC%98%81%EC%8B%A0_%EC%B4%9D%EC%9E%A5_%EC%B6%94%EB%8F%84%EC%82%AC.jpg]] '''1960년, 추도사를 하던 중 울음을 터트려버린 임영신 총장''' 9월 10일, 의혈탑(義血塔)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의혈탑의 후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중앙아 네이름 거룩하도다 사물의 중앙이요 만물의 중심이로다. 유명을 달리한 여섯의 불사조들아 아 그날 4월 19일 '의에 죽고 참에 살자' 는 깃발을 앞세우고 불의와 부정을 물리쳐 이 나라 이 민족의 영원무궁한 행복을 위하여 무자비한 총탄에 고귀한 피를 흘렸으니 그들의 모습 화랑의 재생이요 모교의 상징이로다. 그대들이 흘린 피는 헛되지 않아 이 땅에 참된 자유와 평화의 씨를 뿌렸으니 희망과 건설의 제2공화국이 탄생되었노라. 우리는 그들이 불모의 땅을 파헤치고 뿌려두고간 민주의 새싹을 우리의 삶이 다할 때까지 서로가 지킬 것을 맹서하노니 의를 위하여 몸을 바친 그들의 영령 참에서 영원이 살아있으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19%EC%9D%98%ED%98%88%ED%83%91%EC%A0%9C%EB%A7%89%EC%8B%9D.jpg]] '''1960년, 의혈탑 제막식'''[* 1992년 12월에는 의혈탑을 중앙도서관앞으로 이전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