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앙대학교/역사 (문단 편집) ===== 1964년 6.3 학생운동 ===== 1960년 4월혁명은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짓밟혔다. 그러나 당시 학생회는 타 대학과 마찬가지로 5.16 지지선언을 내었고, 6월 9일 전국대학교 총학장단은 혁명정책 지지결의문을발표하였다. 이는 4월혁명에서 충족되지 못한 기대가 5.16으로 채워질 것이라는 기대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향토개척단이 발족되어 군사정부의 재건국민운동 정책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1962년부터 향토개척단과 농촌봉사활동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은 체제내적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군사정부가 군정연장 선언으로 민정이양이 불확실하게 되면서, 학생운동은 다시금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1963년 3월의 서울대 자유수호 궐기대회와 5월의 경북대 군정연장 반대시위로 이미 군사정부와의 일전을 예비하였으며, 이는 한일회담 반대투쟁으로 이어졌다. 6.3 학생운동은 2년여에 걸쳐 전개된 장기간의 대규모 대중투쟁이었다. 5.16 쿠데타 세력에 대한 최초의 대규모 투쟁이었기에 구속자도 총 500여 명에 이르렀다. 이 기간에 중앙대학교 학생들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1964년 들어와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회담 추진의 군사/경제적 배경과 한일협정의 체결 의지를 드러내는 연두교서를 발표하였다. 이에 정치권에서는 평화선 양보 등 '대일 굴욕외교' 에 반대하는 '범야공동 투쟁기구' 를 결성하여 적극적인 원외투쟁을 전개하였으며, 학생들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3월 23일 '5월 초순에 한일협정 조인' 이라는 김종필의 도쿄발언은 타오르기 시작한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바로 다음날인 24일, 전국 주요도시에서 8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참여한 대규모시위 투쟁이 전개됨 으로써 마침내 6.3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3월 25일 총학생회가 중심이 되어 약 2천여 학생들이 교정에 모여, 굴욕외교에 대한 성토대회를 열고 정부의 대일외교 저자세 규탄과 평화선을 사수하자는 결의문과 선언서를 채택 통과시켰다. 결의문 채택에 이어서 '일장기' 를 찢는 것을 신호로 스크럼을 짜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파일:external/f1badad9bd03d67d420082c55b0a9bf509aaf5b7733dad6c11077c40f7e5dd8b.jpg]] '''1964년, 한일외교정상화 반대운동''' >정부는 한일 저자세 외교를 즉각 중지하고 평화선을 끝까지 사수하라! 정부는 국민여론에 귀를 기울이고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어선을 강력하게 단속하라! 일본정부는 36년간 한국 국민을 탄압 통치한 죄상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사과할 것이며, 재일교포 북송 등 양면 외교를 즉각 중단하라! 삼각지를 거쳐 서울역에 도착한 중앙대학교 학생들은, "바다 팔아 정치 말고, 비밀 외교 공개하라", "중지하라 매국외교, 삼천만은 통곡한다" 는 구호를 외치면서, 시청과 국회의사당을 통과하여 중앙청 광장에 도착하여 연좌농성을 벌였다. 이때 최두선 국무총리의 "학생들의 요구사항을 대통령에게 건의, 국정에 반영토록 하겠다" 는 요지의 발언을 듣고 해산하였다. 3.24 시위 이후 연일 계속된 학생시위가 잠시 잠잠해졌지만, 시위주동 학생들에 대한 '괴소포' 전달사건, 학원사찰 등으로 물의가 빚어졌으며, 일본으로부터의 박정희 정권 정치자금 수수설 등이 유포되는 등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4.19 전후로 학생들의 데모가 재개되었다. 4월 19일 중앙대학교 500여 학생들은 경희대 등 3,000여 명과 함께 시청 앞에서 4.19 기념행사를 한 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데모를 하고 중앙청 쪽으로 밀려가다 경찰과 충돌하였다. 각 대학의 연일 계속되는 시위와 정부의 강경한 대응으로 많은 학생들이 다치거나 구속되었다. 정부의 강경책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되자 24일 서울시내 28개 대학 총장들은 시국수습을 위한 4개 항목의 결의안을 채택하고, 정부는 학원사찰을 중지하고 학생들은 의사가 충분히 표명되었으니 학업에 전념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정일권을 국무총리로 하는 이른바 '돌격내각' 을 줄범시키고, 정국을 정면돌파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이러한 강경한 정부방침으로 잠시 주춤하였던 학생들의 시위는, 5월 20일 '한일굴욕외교반대 대학생총연합회' 주최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 에서 5.16 쿠데타를 4월 혁명에 대한 전면적 도전이었다고 규정하면서 다시 격화되기에 이른다. 위기 의식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3일 오후 9시 40분 대통령공고 11호로 서울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에 의해서 발표된 계엄사포고 제 1호의 6항, 즉 서울시내의 각급 대학교와 중/고등학교 및 국민학교는 1964년 6월 4일을 기하여 별도지시가 있을 때까지 일제히 휴교한다는 조항에 따라 휴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6.3 계엄선포 후 352명의 학생들이 징계를 받았는데, 8월 22일 현재 45명 제적, 237명 무기정학, 70명 유기정학 등이었고 224명이 구속되었다. 이 중 계엄사범으로 재판을 받은 중앙대학교 학생은, 내란예비음모 [[서청원]](정외 2), 내란미수 차진모(정외 2), 백광수(정외 2), 유원철(정외 2), 공석근(정외 2), 김용길(정외 4), 고창섭(국문 3) 등 7명이다. 학생회에서는 9월 11, 12일 이틀간에 걸쳐, "구하자, 우리 학우를" 이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구속학생 석방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무려 4,986명에 달하는 서명을 받은 학생회는 이를 학생처에 전달하였고, 임영신 총장은 이를 받아들여 정부에 전달하였다. 당시 총 7명의 구속자 중 4명은 보석으로 풀려나 있었고 3명이 구속되어 있는 상태였다. 1965년 2월 19일 한일협정 기본조약이 가조인되었고, 4월 3일 동경에서 어업/청구권 및 교포 법적 지위 등 3개 현안이 정식 가조인되었다. 3월 26일 동국대생들이 '치욕적인 제2을사조약 가조인 무효' 를 주장하는 성토대회를 연 것을 시작으로 1965년 한일협정비준 반대투쟁의 막은 올랐다. 4월 13일 중앙대학교를 포함해서 여러 대학에서 시위를 벌였는데, 그 전날 고창섭 등 6개 대학 '평화선사수학생투쟁위' 의 대표 10명이 불법집회 용의로 연행되었다. 4월 14일 정오경 중앙대학교 학생 약 1,000명이 "민족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사수하자" 는 구호를 외치며 교내시위를 벌인후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또 이틀 뒤인 4월 16일 총학생회 주최 한일회담 반대 성토대회가 1,500여 명이 참가한가운데 열렸다. 이 대회에서 안건을 건의하는 것으로 끝맺으려는 주최측 의도와는 달리 '중대 매국외교저지 결사투쟁위원회' 에서 "제2의 을사조약, 선열은 통곡한다"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교문을 나섰다. 교문앞 500미터까지 나가 흑석동입구에서 3개 소대의 기동경 찰대와 대치하다 경찰의 최루탄발사에 맞서 투석전을 전개하였다. 이날 경비행기까지 동원한 경찰과의 충돌로 101명이 연행되어, 이 중 3명이 구속되었다. 4월 13일 집회에서 부상당한 동국대생 김중배가 사망히여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는 양상을 보이자, 문교부는 4월말까지 학교장 재량으로 임시휴교 지시를 내렸다. 당시 동국대(16~30일), 서울 사대(17~22일), 서울 법대(16~22일), 연세대(19일) 등과 서울시내 65개 고등학교도 휴교에 들어갔다. 한일협약 조인 날짜가 다가오자 서울대를 중심으로 단식투쟁으로 맞서는 상황에서, 6월 18일 '중앙대 한일회담 반대 구국투쟁 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한일회담 정식조인을 하루 앞둔 6월 21일 우리학교를 포함한 12개 대학 학생들과 대광/숭실/양정 등 3개 고교생 도합 1만여 명은 '매국외교 반대' 를 외치며 시위행진에 돌입하였다. 7월 14일 밤 8시 40분, 공화당은 한일협정 비준동의안을 기습적으로 발의하였다. 이에 따라 '정치 방학' 기간인 7월의 정국은 더욱 긴박하게 전개되었다. 8월 25일 오후 박정희 대통령은 학생데모의 뿌리를 뽑겠다는 강경한 내용의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26일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이 발동되었는데, 이는 '선포없는 계엄상태' 에서 한일협정 반대투쟁을 강경 진압하려 한 것이다. 1965년 비준반대 투쟁관련 구속자 가운데 9월 1일 현재 구속중인 중앙대학교 학생은 강석흥, 김경수, 김언호, 조병만, 김재현, 고재욱, 배정운, 김종권 등이었다. 또 제적학생으로는 정외과 2학년인 배정운/김종기/김종관, 정외과 4학년안 홍순철/김재현, 농업개발학과 3학년 [[이재오]] 등 6명이었다. 중앙대학교의 1965년 데모를 주동한 세력은 이재오 그룹으로서, 바로 '대포수양당' 이라 불리는 64학번 경상대 5인방 모임이었다. 이들의 대표격인 [[이재오]]는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 투쟁국면에서 총학생회 기능이 마비되자 비상학생총회인 중앙대 구국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한일협정비준반대 각대학 연합체 본교 대표로도 활약하였다. [[이재오]]는 제적되었다가 복적이 안 돼 1996년 2월, 32년만에 비로소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