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앙대학교/역사 (문단 편집) ===== 중앙유치원의 특색과 초창기의 모습 ===== 이상에서 살펴 보았듯이 뚜렷한 민족의식과 교육목적 아래 온 겨레의 주시 속에서 출발한 중앙유치원은 몇 가지 특색에 힘입어,겨레의 정성어린 뒷받침을 받아 계속 발전할 수 있었고, 사회/문화의 각 방면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첫째, 중앙유치원은 장래 국가와 민족을 이끌어 나갈 민족 지도자를 길러 내려고 하였다. 당시 일제하라는 식민지 체제에서 우리말을 교수 용어로 사용하여 투철한 민족의식을 원아들에게 불어 넣었던 것이다. >둘째, 서울의 중심부 종로에 자리잡고 있어서 상인 가정의 자녀가 많았다. 더욱이 신분과 직업에 구애됨이 없이 문호를 개방하여 문자 그대로사회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셋째, 유치사범과가 있어 보육의 이론과 실습을 연마하는 곳이었으므로 자연 유치원 교육의 대종이 되는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리하여 중앙유치사범과 출신들은 전국 유치원에 분포되어 당시 한국 기초교육의 초석을 다져놓았다. >넷째, 그 경영/유지가 전적으로 한국인의 힘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보육 기관으로서는 서울에서 한국인의 힘으로 경영되는 유일한 존재라는 점이 뚜렷한 특색이었다. 더욱이 유치원의 매월 월사금이 경성유치원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는 50전이라는 점도 이 유치원이 갖는 서민적 성격의 일단을 드러낸 것이었다. 중앙유치원은 초기에는 교육 면에서 많은 애로를 겪었다. 1916년 브라운리에 의하여 유치원이 개원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낮은 경제적 수준으로 인하여 자녀들에 대한 부형들의 일반적 교육열이 저조하였고, 유치원 교육에 대한 이해는 매우 빈약하여 유치원의 월사금이 매삭 불과 10전(경성유치원의 20분의 1)이었는데도 규칙적인 유치원 교육을 시키려는 사람은 없다시피 하였다. 그래서 집집마다 사람이 가서 모집해 와도 원아는 겨우 30명 정도이었다. 당시 유치원 원아들의 수업연한이란 것도 막연하여 1년 이상 다니는 원아도 있었고, 유치원 구경이나 하는 듯 한 달 남짓 다니다가 그만두는 원아도 있었다. 원래 계획한 교육과정대로 교육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고, 대개 보통학교 입학 시기에 와서 졸업장을 만들어 갔다. 이와 같이 유치원 교육을실시할 수 있는 사회의 경제적 여건, 이에 따른 학부형들의 교육열과 시설 등에서 숱한 난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유치원의 교육 수준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높았다. 중앙유치원에서는 노래/유희/그림/수공(手工) 등을 가르쳤다. 노래는 독일 민요 등 수준이 높은 것을 우리말로 옮겨서 가르쳤는데, 이는 대개 미국 선교사들이 본국에서 사용하였던 유치원 교육법을 적용한 것이었다. 중앙유치원은 좋은 교육방법을 적용하고 많은 어린이들에게 골고루 교육의 혜택을 주려고 노력하였지만, 초기에는 경영난과 유치원 교육에 대한 이해 부족 등으로 유치원 과정을 다 마치는 원아는 그리 많지 않았다. 유치원이 설립된 이래 1926년 1월까지 약 10년 동안 310명의 졸업생, 사범과에 25명의 졸업생을 냈을 뿐이었다. 이러한 수치는 그 동안의 사회의 온정과,그에 못지 않은 심각한 경영난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