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영공동선언 (문단 편집) === 서명 이후 양국의 반응 === [[영국]]에서는 [[홍콩]]을 중국에 돌려주는 것에 대한 반발도 꽤 있었다. 무엇보다 이 공동선언의 비준과 이행에 대해서는 홍콩 주민들의 의사를 묻는 [[주민투표]] 등의 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당시 [[영국 노동당]]에서는 "중국에 아첨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버리고 홍콩을 바쳤다"는 반응까지 보였다. 한편으로 대외 강경책을 선호했던 [[마가렛 대처]] 총리가 결국 홍콩 반환에 동의한 것을 의외라고 평가한 사람들도 많았다. 물론 중국이 강경하게 나가면 홍콩을 지킬 방법은 없었고, 뭐가 되었든 [[영국령 홍콩]]은 [[제국주의]]의 잔재이기도 해서 명분이 부족해 어쩔 수 없었다. 학계에서 중영공동선언과 홍콩 반환은 명목상으로나마 남아 있던 '[[대영제국]]'의 마지막 잔재가 사라졌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 홍콩 반환은 [[덩샤오핑]]의 대표적인 외교 부문의 업적으로 꼽힌다. 일국양제 부분은 약간의 반발이 있었지만 대체로 현명한 묘안이라는 평가를 얻었으며, 영국 내에서도 크게 만족하였다. [[덩샤오핑]]은 중국 땅이 된 홍콩을 밟아보는 게 일생의 소원 중 하나였지만 반환식을 보기 직전인 [[1997년]] [[2월 19일]] 사망하였다. 이러한 아쉬움을 반영한 듯, 덩샤오핑의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된 후 홍콩 앞바다에 뿌려졌다. 대조적으로 공동선언 당시 [[영국 총리]]였던 마가렛 대처는 홍콩을 직접 방문하여 반환식을 지켜보았다. 선언 발효 이후 영국과 중국의 해석 차이로 문제가 좀 있었다. 중국은 '현행'의 의미를 선언 발효 시점인 1984년으로 본 반면 영국은 반환 시점인 1997년으로 보았다. 이게 문제가 된 것은 영국령 홍콩 정부가 1984년과 1997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민주적 정치개혁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저런 개혁이 하나 하나 있을 때마다 중국은 공동선언 위반을 지적했고, 홍콩 반환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조차가 끝나서 중국에 반드시 반환해줘야 하는 [[신계(홍콩)|신계]]에 세워질 예정이었던 [[홍콩 국제공항|첵랍콕 국제공항]]의 건설을 방해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