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원대전 (문단 편집) === 서북의 준동과 계계의 진압 === 옌시산은 펑위샹에게 80만 원의 군비와 대량의 신식 무기를 제공하여 3개 군단을 편성하게 했고 녹종린을 전선 총지휘관에, 손양성, 유욱분, [[쑹저위안]]을 각각 1,2,3군단장에 임명하여 섬서성을 공격하게 했다. 3월 17일 이들은 섬서성 동관을 함락시켰고 농해철로를 따라 하남성에 침입, 카이펑과 귀덕 등 여러 요충지를 점령하고 쉬저우로 육박했다. 이에 중앙군은 5월 12일에 2군단 3사단을 선봉으로 하여 쉬저우에 농해철로를 따라 진군하며 반격에 들어갔다. 5월 18일. 중앙군은 귀덕을 점령하고 있던 적을 섬멸, 무장해제시키고 6월 1일 카이펑 인근의 난봉까지 적을 밀어붙혔다. 하지만 옌시산이 서둘러 전선의 병력을 증강했으며 펑위샹과 옌시산의 기병대가 출격하여 중앙군의 후방을 공격함에 따라 전방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2군단이 카이펑으로 향하는 동안 중앙군 3군단도 반격을 시작, 언성 일대에서 북상하기 시작했다. 허창과 임영에서 격전이 벌어졌고 6월 6일 중앙군 공군의 가세로 허창에 있던 번종수가 전사하자 반장연합군의 기세가 꺾여 퇴각하기 시작했다. 6월 7일 중앙군은 허창을 점령했으나 2군단처럼 곧 공세종말점에 도달했다. 장제스는 장쉐량과 친분이 두터운 [[리스쩡]]을 봉천에 보내 출병해줄 것을 요청했고 이어 하성준도 보내 6월 14일부터 7월 초까지 장쉐량에게 참전을 촉구했지만 장쉐량은 전국이 빨리 끝나는 것을 원하지만 동북에 아무런 영향이 없고 만주의 원로에게 누가 되지 않는 경우에만 국가와 장제스를 위해 헌신하고 출병할 수 있다고 거절했다. 만주 구파는 7월 말까지도 참전 반대를 분명히 했다. 한편 옌시산과 펑위샹이 북방에서 진군하는 동안 남방에서 [[바이충시]]가 지휘하는 리쭝런, 장파쿠이의 연합군 4만명이 궐기하여 북상을 시작했다. 광서에서 일어난 반장군은 5월 27일 형양, 6월 3일 장사, 6월 8일 악주를 점령함으로 호남성을 장악했으며 우한을 위협했다. 하지만 반장군은 호남성 주석 자리를 두고 다투기 시작했고 우한행영 주임 [[허잉친]]이 8로군과 4로군을 지휘하여 호남 북부와 광동 북부에서 협공하여 반장군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6월 15일 허잉친은 악주를 탈환했으며 6월 17일 감사대와 해군의 협조를 얻어 장사를 탈환함으로 남방의 반장군의 기세는 금세 수그러들었다. 이어 [[천지탕]]이 이끄는 광동군에게 형양이 함락되면서 북진이 불가능해지자 리쭝런은 호북공격을 단념하고 병력을 호남으로 물렸다. 하지만 서북군의 기세는 여전히 왕성하였다. 7월 15일 장제스는 크게 고민하고 있었다. >이 순간 단지 조용히 참고 있고, 군의 신뢰를 유지하려 애쓰며, 상황이 안정을 찾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때가 되면 극복할 희망을 품을 수 있다. 만약 최악의 사태가 닥친다면 당과 나라를 위해 생명을 버릴 수 있을 따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