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인전쟁 (문단 편집) == 배경 == 영토 문제의 발단은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국을 차지하던 [[청나라]]와 [[인도 제국]]을 지배하던 [[영국]]은 [[아편전쟁]]의 결과로 [[홍콩]]을 할양하는 조건에서 영토 문제를 일단락지었다. 청은 열강이 더 이상 자국의 땅을 넘보는 것을 원치 않았고, 영국도 필요 이상 중국을 침범하면 이 알토란 같은 땅을 넘보는 다른 열강들과 복잡한 대립각을 형성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문제가 되는 [[티베트]] 땅은 자원에서나 전략적인 면에서나 양국 모두에게 큰 가치는 없었다. 이후 청이 [[신해혁명]]을 통해 무너진 기회를 틈타 영국은 청나라에서 독립을 선언한 [[티베트]] 정부와 국경 협상을 벌여 1914년 '''[[맥마흔 라인]]'''을 선포하여 티베트와 영국령 인도 제국 사이의 국경선을 선언하였다. 영국은 인도를 독립시켜 준 뒤에도 이 라인을 [[인증]]했고, 중국 입장에서는 당연히 불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인도는 독립과정에서 종교 간 대립으로 인해서 전쟁 끝에 [[힌두교]] 중심의 [[인도]]와 이슬람권의 [[파키스탄]]으로 분열하여 별개의 국가로 출범한다. 이슬람권인 파키스탄이 [[미국]]과 친밀한 관계를 보이자, [[비동맹주의]]를 내걸고 미-소간의 [[냉전]]에서 중립적 태도를 내건 인도에서는 국방에 대한 불안이 고조되었다. 비슷한 시기, [[중일전쟁]] 종전 직후부터 중국은 [[중국 국민당|국민당]]과 [[중국공산당]] 간의 [[국공내전]]에 빠져들었고, 4년간의 내전 끝에 중공이 승리하여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가 될 때까지는 아직 자국 내 안정을 찾기 힘든 상태였다. 이후 [[6.25 전쟁]]에 참전하여 [[유엔군사령부|UN군]]을 몰아붙이는 저력을 발휘해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동시에 1951년 인민해방군을 동원해서 [[티베트]]를 무력병합하였다. 1920년대 이래 사실상 독립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티베트의 토착 정권은 인민해방군의 침공 이후 중국공산당과의 17개조 합의를 통해서 자치권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티베트가 중국의 영토라는 것을 인정한다. 이후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지역 대표로 베이징에서 열리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 직접 출석해서 [[마오쩌둥]]과 만나는 등 한동안은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는 국내외 상황이 어느 정도 수습되어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불안정한 국경을 확정지을 필요를 느꼈다. 한편으로 1950년대 [[흐루쇼프]]가 집권한 소련과 공산주의 노선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면서 [[중소관계]]는 악화일로 치닫다가 1959년, [[중소결렬|완전히 파탄난다.]] 이에 따라 소련은 중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인도에 접근한다. 1960년에는 소련 군사고문단이 중국에서 철수하고, 대신 인도에 소련 군사고문단이 파견된다. 이렇듯 친소 노선을 걸으며 [[맥마흔 라인|맥마흔 조약]]에 따른 국경선을 확정하려는 인도와 중국은 불편한 관계를 지속하게 된다. 당시 중국과 인도 모두 정부수립 10년이 안 된 신생 국가로서 불안정한 국내외 사정을 어떻게든 타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중국-인도 양국의 직접적인 감정적 앙금은 두 나라 사이에 위치한 [[티베트]]로부터 비화되었다. 청나라에서는 티베트를 반자치령으로 용인했고, 20세기 초반 중국의 혼란기에 반독립상태로 있던 티베트에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자 일단 [[달라이 라마]]는 중국과 협정을 맺고 자치권을 보장받는 대신 중국의 영토임을 인정하게 된다. 인도 또한 1948년 직후, 같은 신생국의 입장에서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티베트 종주권을 인정한다. 곧이어 1954년에 '중국의 티베트 지역과 인도 사이의 무역과 교섭'을 체결함으로 이 문제는 공식적으로 문서화되었다. 1960년에는 중국에서 벌인 2년간의 [[대약진 운동]]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고 [[중소결렬]]로 중국에 대한 소련의 기술, 군사적 지원이 완전히 끊기면서 중국은 위기에 빠진다. 상대적으로 인도의 입김은 더욱 강해져갔다. 그리고 1960년대 들어 본격적인 [[냉전]]이 도래하면서 [[중동]],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의 역할이 부각되었고, 중국과 인도는 제3세계 국가들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반제국주의를 표방한 중국은 1961년 비동맹회의 참여를 거부했는데, 이것은 중국이 노리던 제3세계의 종주국 자리를 포기하고 독자 행동을 취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에는 비동맹회의가 곧 제3세계를 의미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