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일전쟁/전개 (문단 편집) === 왕징웨이의 배신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왕징웨이 공작)] > "중국은 나 하나로 절대 망하지 않는다. 이것은 내 몸 하나를 파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1939년 12월 30일 일화신관계조정요강에 서명한 [[왕징웨이]]의 발언. 한편 일본은 우한 함락 이후 국민정부가 붕괴하리라 예상했으나 여전히 국민정부는 건재했으며 각지의 군벌은 국민당에 복종하고 있었다. 이에 [[고노에 후미마로|고노에 내각]]은 1938년 1월 16일 '국민정부를 상대로 하지 않고 일본과 진정으로 제휴가 가능한 신흥지나정권과 공존할 것'을 천명했고 2일 후에는 '''상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시(ignore)가 아니라 {{{#red 말살}}}'''을 의미한다.'''라고 부연설명을 달았다. 국제법상 유례가 없는 발언인 이것은 국민당의 내부분열을 시도한 것이며 이것은 [[왕징웨이]]의 탈주로 실제로 일어났다. 국민당의 초창기 멤버이자 거물인 왕징웨이는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완전히 패배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장제스의 지연전을 중국의 숨통을 끊는 행위라고 비난했고 일본과 협상하여 그들의 선처를 얻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심복인 가오중우를 [[홍콩]]에 보내 일본과 비밀리에 협상하기 시작했다. 가오중우는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 주권을 인정한다면 항전을 중지하겠다는 왕징웨이의 의사를 전달했다. 중일이 양국 대사를 소환한 이후에 중일의 유일한 대화창구는 예문연구회였는데 가오중우는 이 예문연구회의 수장이었다. 가오중우는 이미 1938년 2월 심복인 둥다오닝을 일본에 보내 일본 수뇌부와 접촉한 전력이 있었다. 당시 일본은 나쁜 과거를 잊고 정성으로 서로를 대하면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란 반응을 보인 바가 있었다. 이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일본측이 화평 해결이 조급하다고 평가하고 더 이상의 화평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왕징웨이는 7월 즈음에는 자신의 주화론에서 장제스를 배제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본은 노골적으로 왕징웨이에게 전국을 해결하자며 러브콜을 보내기 시작했다. 일본 내각은 7월 12일 중국의 ‘일류 인물’을 선별하여 반장제스, 반공산당, 반전을 표방하는 신정부를 건립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8월에 홍콩에서 다시 회담이 열렸고 왕징웨이의 심복 메이쓰핑은 왕징웨이의 충칭 이탈 이후 신정부 수립에 대해 처음으로 논의했다. 이들은 왕징웨이의 신정부가 수립되면 윈난, 광둥의 반장제스 군벌들이 합류하리라 믿었다. 10월에 이르러선 왕징웨이가 기자들 앞에서 독자적 대일 협상의 가능성을 언급하기에 이르렀다. 11월 상하이의 중광당회담에서 일본과 왕징웨이는 중일 간의 방공협정, 만주국 승인, 중국 내부 일본인 거주, 영업 허가와 일본 조계, 치외법권 폐지 고려, 화북 5개성의 중일 합작 개발, 일본의 내몽골 주둔, 내몽골 이외 지역의 일본군의 즉각적 철수를 교섭 사항으로 내세웠다. 일본은 기존 괴뢰정부인 베이핑의 임시정부와 상하이 유신정부를 해체하여 왕징웨이 정부에 합치자고 하였고 왕징웨이의 편에 설 것으로 예상된 윈난, 광둥 군벌군을 일본군이 지원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왕징웨이가 우려한 내정간섭 분야에 있어서 화북, 난징, 상하이, 항저우 지역에 계속 병력을 주둔시키고 고문 파견을 통한 영향력 행사를 명시함으로 중국 침탈을 계속할 것을 드러냈다. 어쨌거나 마음을 굳힌 왕징웨이는 12월 18일 [[청두]]로 강의하러 간단 핑계로 부인과 측근들을 데리고 [[쿤밍]]으로 떠났으며 19일 [[하노이]]로 떠났다. 1939년 1월 1일 장제스는 처음에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그가 돌아오길 바란다고 하다가 결국 왕징웨이가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았는지 왕징웨이의 국민당 당적을 삭제하고 모든 직위에서 해임하며 왕징웨이의 배신과 정부 정책을 멸시한 죄를 물을 것이라 이를 갈았다. 하노이에 도착한 왕징웨이는 장제스에게 평화회담을 호소했지만 장제스는 이를 무시하고 왕징웨이를 암살하려고 시도했으며 이러한 시도는 그가 죽기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여하튼 왕징웨이는 일본 화물선에 숨어 상하이에 도착했고 신정부를 수립했다. 하지만 일본은 왕징웨이와의 중광당 밀약에서 약속한 일본군 철수와 중국 주권 보장에 대해선 오리발을 내밀었다. 결국 왕징웨이는 또 다른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왕징웨이는 주석대리 겸 행정원장, [[저우포하이]]는 부주석 겸 행정원 부원장, [[천궁보]]는 입법원 원장, 량훙즈는 감찰원 원장, [[왕커민]]은 화북정무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한때 중국의 북방을 지배한 대군벌 [[우페이푸]]도 일본의 제안을 받았고 그는 이에 ''일본군이 먼저 철군한다는 전제'를 붙이는 사실상의 거부로 답했다. 이후 그는 일본인 치과의사의 치료를 받다가 의문사했는데 이에 대해서 일본의 암살설이 제기되고 있다. 우페이푸의 상전이자 북양정부의 대총통을 지냈던 [[차오쿤]](조곤)도 일본의 회유를 받았으나 거절했고 1938년에 사망했다. 일본도 왕징웨이도 왕징웨이 주도의 신정부가 수립되면 반장제스 군벌들이 대거 왕징웨이에게 합류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파쿠이]]나 [[룽윈]]을 비롯한 반장제스 군벌들은 왕징웨이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으며 장제스의 권위만 확인되었다. 장제스는 두웨성을 시켜서 가오중우 등 왕징웨이의 측근 일부를 홍콩으로 망명시킨 다음 왕징웨이와 일본이 체결한 밀약 내용을 폭로하였다. 이에 온 중국이 분노하였고 왕징웨이는 과거의 혁명가에서 역적이자 [[한간]]으로 떨어졌다. 그는 이후 1944년 골수암으로 일본에서 사망했고 중국이 승리한 이후 장제스는 그의 무덤을 폭파시켜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