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일전쟁/전개 (문단 편집) === 일본군의 1943년 공세 === 해를 넘겨 1943년에 접어들자 영미의 거센 반격으로 일본의 열세와 불리함은 날이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었고 지나파견군에서도 계속 병력을 차출해서 남방의 구멍을 메워야 했다.[* 당시 일본군의 딜레마는 영미, 중국과의 양면전 뿐만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 점령지에도 많은 병력을 할애해야만 했기에 더더욱 불리한 상황이었다.] 날이 갈수록 전황이 불리해지고 전력이 축소되자 지나 파견군은 상황이 더욱 열악해진 1943년에 들어서서야 허겁지겁 반격을 기획하고 우한의 위협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후난과 후베이 지역에 3차례에 걸친 공세를 감행했다. 1943년 2월 초에 벌어진 1차 공세로 강북 섬멸작전이 시작되었다. 후베이 성 남부의 웨이저우의 중국군 6전구 소속 2개 사단을 섬멸시키기 위한 작전이었는데 중국군 2개 사단을 전멸시키기 위해 일본군 3개 사단이 동원되었다. 질적으론 말할 것도 없고 수적으로도 일본군의 반 밖에 되지 않던 중국군은 순식간에 참패하였고 중국군 8600명이 전사하고 2만 3천 명이 포로로 잡혔다. 일본군은 254명의 전사자만 발생했다. 정작 일본군은 병참 상의 문제로 많은 병력 손실을 입었다. 작전은 3월에 종료되었고 일본군은 중국군 2개 사단의 반격까지 손쉽게 격퇴한 다음에 퇴각했다. 1943년 4월 후베이 성의 6전구 주력을 섬멸하고 후베이의 곡물을 약탈하기 위한 2차 공세인 강남 섬멸작전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무려 4개 사단과 독립혼성 17여단 및 여러 독립지대들을 동원했고 왕징웨이 괴뢰정부 산하의 화평군 1만 명까지 차출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고질적인 미숙한 병참으로 인하여 공격은 산발적으로 시작되었다. 4월 9일에 공격을 시작한 일본군은 중국군을 격퇴하고 많은 식량을 약탈했다. 5월 중순에 중국군은 쓰촨 성과 후베이 성의 경계인 스파이 요새까지 밀려났는데 이 요새가 뚫린다면 충칭의 숨통에 총구가 겨눠지는 격이었다. 물론 중국군도 그 중요성을 잘 알아 스파이 요새에 최정예 부대인 11사단을 배치한 상태였다. 일본군 13사단이 스파이 요새를 돌파하기 위한 공세에 들어갔으나 중국군은 지형의 이점을 이용하여 일본군을 격퇴해냈다. 이때 미국 공군과 중국 공군이 일본군의 병참로를 습격하면서 일본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 6전구 사령관은 천청은 일본군이 스파이 요새에 발목이 잡힌 틈을 타서 반격을 감행, 일본군 13사단을 포위하려 했다. 자신들이 위기에 처한 것을 깨달은 13사단은 공세를 멈추고 퇴각했다. 일본군은 자신들의 전사자가 771명이며 중국군은 3만 명 사살, 4천 명 포로의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으나 중국군은 일본군 2만 5천 명을 사살했다고 주장했다. 일본군은 자기들답게 후베이 성에서 창자오 학살을 감행 3만 명의 포로와 민간인을 학살하고 또 대규모 강간을 자행했다. 일본군은 중국군에게 일부 전술적 피해를 입히긴 했지만 전략적으로 얻은 것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태평양 전선의 상황이 악화되면서 오히려 중국 주둔군을 차출하여 남방에 파견하기 위한 감호전용계획이란 것을 짜야 할 지경이었다. 이에 일본군 11군 사령관 요코하마 이사무 장군은 대규모 병력을 차출하는 것은 전선에 차질을 준다면서 병력을 빼내기 전에 중국군에 공세를 가하여 위협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 대본영이 이를 승인하면서 이름도 유명한 창더 섬멸작전이 시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