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중일전쟁/전개 (문단 편집) === 버마 탈환전 === [[대륙타통작전]]에서 시간을 약간 거슬러 올라가서 1943년 인도에선 치욕적으로 버마를 걸어서 탈출해야 했던 [[스틸웰]]의 버마 탈환 작전이 구상되고 있었다. 스틸웰은 이미 1942년 6월에 [[장제스]]에게 버마를 탈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고 영국과 연합하여 버마를 탈환하겠다는 야심을 키웠다. 이 과정에서 창설된 것이 5만 명의 중국군으로 구성된 'X군'인데 장제스는 영국이 지휘권을 가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X군의 창설을 승인했다. 하지만 미국의 입장에선 태평양보다 부차적인 중국 전선에 돌아가는 지원의 양은 극히 적었고 정작 버마의 지배자인 영국인들이 버마 탈환에 시큰둥하면서 버마 탈환은 순조롭지 못했다. 영국은 중국의 아시아에서의 발언권이 세져 영국의 영향력이 축소될 것을 두려워했고, 중국군의 도움을 한사코 거부했으며 인도에 들어온 중국군을 내쫓기 위해서도 여러차례 시도했다. 루스벨트가 중재하여 중국군의 인도 주둔은 유지되었으나 미국, 영국, 중국이 모두 반대하면서 난항은 계속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버마를 탈환할 필요성을 못 느껴 비협조적으로 일관했고, 중국은 영미의 협조가 없는 상황에서 중국군만 피를 흘릴 순 없다고 반대했다. 게다가 장제스는 스틸웰이 이미 자신이 준 10만 명의 정예부대를 말아먹은 것을 기억했기 때문에 X군도 말아먹지 않을까 매우 우려했다. 이에 따라 스틸웰의 버마 탈환 작전인 '애나킴 작전'은 진척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1942년과 1943년 2월의 영국군의 제한적 반격이 큰 피해만을 남긴채 실패로 돌아간 것으로 영국은 더욱 소극적이 되었다. 1943년 5월 트라이던트 회의에서 연합국 수뇌부는 버마 탈환에 손을 떼버리고 중미연합공군의 육성에 지원을 돌렸다. 결국 1942년 11월에 시행 예정인 애나킴 작전은 1943년 말에야 시행될 수 있었다. 스틸웰의 버마 전선은 X군, 영국군 2개 군단, 미국 메릴 부대 등 상당한 대군을 보유하게 되었고 1943년 10월 스튜어트 전차와 쑨리런 휘하의 38사단을 앞세워 버마로 진공했다. 하지만 스틸웰은 일본군의 수와 전투력을 매우 얕잡아보고 버마에는 일본군 5개 사단만 있으며 버마 북부엔 1개 사단도 없다고 허풍을 쳤지만 실제론 8개 사단+본토에서 2개 사단의 증원이 오고 있었다. 1944년 2월에 영국군의 공세가 시작되었고 일본군 55사단장 [[하나야 타다시]]가 영국군의 군수물자를 약탈하겠답시고 하호 작전이란 것을 실시하여 영국군 기관총과 대포 앞에 부하들을 반자이 돌격 시켰다가 박살이 난 통에 일본군의 방어력은 더욱 약해졌다. 그런데 1944년 3월 8일 ~~중일전쟁의 참화에 책임을 느낀[* 취소선은 쳤지만 [[임팔 작전]]의 원인 중 하나는 맞다.]~~ '''[[무타구치 렌야]]가 나섰다!''' 일찍이 [[루거우차오 사건|루거우차오에서 사고를 쳤던]] 무타구치는 이후 버마에 파견되어 1942년 인도 진공 작전인 21호 작전이 무모하다고 철회시킨 이력이 있었는데 그는 연합국은 더욱 세지고 일본군은 더욱 약해진 1944년 3월에 난데없이 인도를 먹을 절호의 기회랍시고 ''''[[임팔 작전]]''''을 가동시켰다. 결과적으로 9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굶주림 속에서 죽어가고 연합군의 공세에 죽어갔다. 하지만 스틸웰은 자신이 일본군에 포위되어 죽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장제스에게 Y군을 보내달라고 졸라댔다. 장제스는 거부했지만 [[대륙타통작전]]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스틸웰은 농간을 부려 결국 Y군을 뺏어온다. 1944년 5월 Y군은 일본군 56사단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나 2년 간 방어선을 구축한 마쓰야마 유조 중장 휘하 56사단은 중국군의 공세를 잘 방어했고 때마침 일본군 2사단과 49사단의 증원으로 버마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한편 영국군과 중국군은 버마 북부의 요충지인 미치나 근처까지 접근했다. 하지만 영국은 지극히 비협조적으로 일관하며 당시 버마 북부가 무주공산이란 사실을 스틸웰에게 알려주지 않았고 스틸웰도 졸렬한 지휘로 일본군에게 전열을 갖출 시간을 벌어다 주고 말았다. 결국 금방 장악할 수 있던 버마 북부는 8월에서야 겨우 연합군의 손에 들어왔다. 스틸웰은 자신의 공을 열렬히 선전했는데 이 중에 영국군이 점령한 모가웅 시를 자신이 점령했다고 하는 바람에 처칠과 마운트배튼 등이 격노하였고 그들은 스틸웰 해임을 루스벨트에게 요구했다. 때마침 '메릴 부대'도 스틸웰의 지휘에 반발했다. 스틸웰의 지휘력은 미국 청문회에까지 올라갔고 애꿎은 메릴 부대가 해체되는 결과를 낳았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L0hqPl4doMo)]}}}|| || 1944년, 윈난성 텅충시 전투의 모습. 미중연합공군 소속 P-51 머스탱이 일본군의 머리 위에 맹렬한 폭격을 가하고 있으며, C-47 수송기의 항공 지원을 받은 중국군은 M3 105mm 경곡사포와 박격포, 바주카를 비롯한 각종 중화기의 화력 지원에 힘입어 진격하고 있다.[* 8분 40초까지. 그 이후부터는 전후의 모습을 담은 영상으로, 국공의 중재를 위해 중국에 온 마셜 원수의 모습이 담겼다.] || 어쨌거나 중국군 38사단은 12월에 버마-중국 국경을 개통했고 Y군도 일본군 방어선을 돌파하고 윈난 성 남부를 점령했다. 결국 일본군은 버마 남쪽으로 계속해서 밀렸고 1945년 1월 X군과 Y군이 합류하고 레도 공도가 개통되었다. 하지만 스틸웰도 끝났다. 대륙타통작전에서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던 장제스는 더 이상 스틸웰과 같은 공간에서 숨쉬길 거부했던 것이었다. 장제스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 미국에게 스틸웰을 해임하지 않을 것이면 미국이 준 물자를 도로 모두 가져가라고 엄포를 놓았고 이에 루스벨트도 굴복했다. 스틸웰은 자신이 전쟁 영웅이라 굳게 믿었지만 귀국 후 선거에 방해되지 말란 핀잔을 듣는 굴욕을 겪었고, 이후 1946년 미군 6군 사령관의 신분으로 위암으로 죽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