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중일전쟁/전개 (문단 편집) === [[앨버트 웨드마이어]]의 등장과 전력의 회복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앨버트 웨드마이어)] 이치고 작전의 궤멸적 타격으로 중국은 한때 충칭이 함락당할 위기에 놓일 지경이었으나 일본군의 병참 한계와 대본영이 충칭을 점령한다 하더라도 장제스를 굴복시킬 수 있을지 회의적이라고 판단하여 충칭 공격은 중단되었다. 새롭게 고문으로 부임한 [[앨버트 웨드마이어]]는 스틸웰보다 훨씬 우호적인 자세로 나가 원조 규모를 늘리고 중국에 물자를 제공함으로 피폐해진 중국군의 전력을 회복하는데 주력했다. 또한 장제스와 스틸웰의 고질적인 마찰거리였던 중국공산당에 대해서도 장제스만이 유일한 합법정부이며 공산당 지원은 있을 수 없다면서 장제스를 지원했고 신임 주중 미국대사인 [[패트릭 헐리]]도 이 의견에 동조했다. 장제스는 1944년 10월 지식청년군을 편성했다. 원래 중국은 고등학생 이상의 인력은 중국 재건의 씨앗으로 보고 징집을 면제해주었는데 [[대륙타통작전]]으로 중국군 전력이 고갈되자 이를 보충하기 위한 엘리트 청년층의 징집이 불가피해지면서 이들에게 손을 내밀게 된 것이었다. 징병으로 곧바로 전환하지는 않고 모집을 했는데, 지식청년군의 모집 소식에 무려 12만 명이 지원했고 그 중 86,000명이 입대시험에 통과했으며 그 중 10,000명은 X군에, 나머지는 경기계화부대로 편성되었다.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지는 것을 직감한 장제스는 군을 재건하면서 1945년 1월 [[쿤밍]]에 육군총사령부를 설치하여 [[허잉친]]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허잉친은 국민정부군 재건 계획을 수립하여 65만 명의 병력을 미군식으로 편제하여 반격할 계획을 꾸몄다. 허잉친은 4,000명의 미군을 중국군에 배치하여 이 과정을 감독했고 중국에 대한 지원도 확대했다. 웨드마이어는 일주일에 한번 미중 참모회의를 열며 미국의 정보를 장제스에게 제공했고 공산당과 협력할 생각도 없다고 확인해주어 장제스를 크게 만족시켰다. 버마의 X군과 Y군까지 돌려받은 장제스는 버마를 통해 물자를 공급받으며 때를 기다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