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일전쟁/전개 (문단 편집) === 화중전역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트라우트만 공작)] 한편 화베이에 국한되어 있던 전황은 일본군이 상하이에서 도발을 감행함에 따라 화중으로 확대되었다. [[훙차오 공항 사건]]을 시작으로 [[제2차 상하이 사변]]이 개막하였다. 장제스는 80여만 대군을 [[상하이]]에 급파하여 일본군의 도발에 맹렬히 맞서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강요했지만 결국 전략적인 실수로 인하여 많은 손실을 입었고 항저우 만의 배후 공격을 용인하면서 패퇴하고 말았으며, [[장강|양쯔강]] 하류 장인에서 벌어진 [[장인 전투]]에서는 '''국민혁명군 해군이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상하이 사변에서의 판단 미스로 국민혁명군은 모든 전력을 소진해버렸고 난징을 지킬 수단을 상실해 버렸다. 중국 국제연맹 대표 [[구웨이쥔]]은 일찍이 8월 30일에 국제연맹에 일제를 제소했지만 [[이탈리아 왕국]]의 반대로 일제에 대한 경제제재가 부결되었고, [[미국]]의 반대로 석유 금수조치도 부결되었다. 한편 일제의 목표는 상하이가 아니라 허베이었고, 허베이가 손아귀에 들어오자 고노에 내각은 삼국방공협정 때문에 악화된 소련과의 관계와 [[쇼와 덴노]]의 조속한 종전 요구를 의식하여 중국에 정전협정을 제안했다. 이는 육군의 반대를 의식한 비밀 회담이었고 여기에 [[나치 독일]]이 중재에 나섰다.[* 원래 상하이 전투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은 영국이 중재에 나섰는데 일제에서 영국의 중재를 거부했다.] 주중 독일대사 트라우트만은 일제의 타협안을 장제스에 전달했다. ||1. [[몽강자치연합정부|내몽골에 자치정부 수립.]] 2. 만주국 국경으로부터 텐진, 베이핑 남방까지 비무장 지대 확대. 3. 상하이의 비무장 지대 확대. 4. 항일정책 중단. 5. 일본에 대한 관세 인하.|| 사실상 화베이 지역을 그냥 다 내놓으라 이 말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영 좋지 않았던 관계로 주화파인 [[왕징웨이]], [[허잉친]]은 말할 것도 없고 강경파였던 [[바이충시]], [[구주퉁]]조차도 받아들이자고 했지만 장제스는 여기서 일제에 굴복한다면 중국인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전쟁 전의 상태로 돌아가기 전까진 어떤 타협도 없다고 천명했다. 이에 일본 외상 히로타는 우리의 요구는 더욱 가중될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장제스를 굴복시키기 위해 난징도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본영은 전선을 확대하면 안 된다고 했지만 본국의 명령을 씹고 난징을 향해 몰려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