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중일전쟁/전개 (문단 편집) === [[지연전|공간으로 시간을 벌다]] === > “우리는 항복하지 않고 앞으로, 반드시 앞으로 진군해야만 한다. 항복은 틀림없이 전 국가적인 참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 >[[장제스]] >"우리는 승리할 때까지, 우리의 두 다리가 정말로 부러질 때까지, 설령 우리의 '''[[중국 대륙|아름다운 땅]]과 [[중국 문명|유구한 역사]]''' 그리고 '''중화의 갈망이 [[난징 대학살|피로 물들고,]] [[충칭 대공습|화염에 삼켜져 멸망할지라도]]''' 계속 싸울 것입니다." >---- >[[쑹메이링]], 1937년 11월 미국 라디오 방송 中 한편 화베이를 지키던 [[펑위샹]] 휘하 6전구의 40만 대군은 너무 다양한 계파의 군사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훈련도 장비도 부족했다. 한편 일본군의 수는 무려 37만에 달했는데 차하얼 성과 쑤이위안 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바오딩을 점령하고 [[산둥성]]을 공격했다. 산둥 성의 성도 지난이 함락되었고 [[칭다오]]엔 일본군 육전대가 상륙했다. 군벌 [[한푸쥐]], [[쑹저위안]], 쑨롄중은 [[빤스런|적전 도주했다]]. 결국 황허 강 이북 전역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었고 펑위샹의 6전구가 폐지되었으며 펑위샹도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한편 일본군 5사단은 그들답게도 상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멋대로 산시 성을 쳤다. 산시 성은 [[옌시산]]의 영지였는데 핑싱관 전투에서 옌시산은 중국공산당과 함께 핑싱관과 신커우전에서 일본군을 무찔렀다. 이에 일본군이 대거 산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장제스]]는 한푸쥐에게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시키란 명령을 내렸지만 한푸쥐는 또 달아났다. 결국 산시도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 옌시산은 남은 영지에 틀어박혀서 일본군과 비밀리에 협상했다. [[항저우]], [[지난]] 등의 주요 도시들이 잇달아 함락되자 가장 강경파였던 펑위샹조차 중국이 반년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 절망했다. 일제는 의기양양하게 [[만주국]]을 승인하고 일제의 점령지를 모두 일본의 괴뢰국으로 만들 것을 요구했다. [[쿵샹시]]는 [[난징 대학살]]을 비난하며 일본의 강화 제의를 빙자한 말 같지도 않은 항복 요구를 거부했다. 하지만 전황이 절망적이었던 터라 [[왕징웨이]] 등은 빨리 일본과 협상할 것을 요구했고 외교부장 왕충후이는 일본에게 협상의사를 전달했지만 일본은 중국의 굴복만 있을 뿐 타협은 없다면서 ‘반성하지 않는 장제스’를 비난하고 주중 일본 대사를 소환했다. 이에 중국도 대사 쉬스잉을 소환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1월 16일 '국민정부의 부정'를 선언했으며 해당 선언은 2일 후에 부정이란 무시가 아니라 '''말살을 의미한다.'''라는 보충설명까지 달았다. 이것은 곧 국민정부를 붕괴시키고 그 대신 일본의 괴뢰정부를 세워 전쟁을 종식시키는 계획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관동군이 이미 1937년 12월 14일 베이핑에서 [[북양정부]]에서 재정총장, 중국은행 총재를 지낸 [[왕커민]]을 내세워 [[중화민국 임시정부(괴뢰 정부)]]를 수립한 바가 있었고 중지나방면군도 난징에서 1938년 3월 28일 [[중화민국 유신정부]]를 수립하고 역시 북양 군벌 정부에서 일했던 량훙즈를 수괴로 세웠다. 하지만 일본이 내세운 괴뢰정부의 이름하에 행해진 학정으로 중국인들은 항일의 기치에 더욱 견고히 결집하게 되었다. 한편 [[우한]]으로 이동한 국방최고회의는 1938년 4월 1일 국방최고위원회를 건설해 전쟁 수행에 집중하기 시작했다(이후 1939년 2월에 장제스가 위원장으로 취임하며 사실상의 정부로 기능하게 된다). 또한 중국은 소련, 미국, 유럽에서 무기를 수입하여 전열을 정비했다. 비록 일본군이 엄청난 영토를 점령했지만 2400킬로미터에 달하는 중국의 긴 해안선은 일본군의 힘으로 단속하긴 너무 길었고 [[홍콩]], [[마카오]], [[광저우]], [[상하이]]의 조계지를 통해서 무기들이 수입되어 중국군을 무장시켰다. 양측이 실익이 없다는 이유로 상호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톈진]] 시는 일본군이 점령했으되 톈진 세관은 중화민국이 관할하면서 텐진의 [[관세]]를 충칭으로 송금하는 기이한 현상도 벌어졌다. 장제스는 이런 점을 이용, 일본군 점령지의 조계지를 이용한 원장 루트를 개설하여 무기를 수입했고 부패한 일본군과 괴뢰 관료들을 매수하였다. 이러한 원장 루트는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에야 차단되었고 양국은 1941년 12월 9일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 공습|진주만을 기습하는]] 자살행위를 저질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후에야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