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종반정 (문단 편집) == 의의와 영향 == 중종반정은 조선 왕조 최초로 순전히 '''신하'''들이 주도하여 '''왕'''을 몰아낸 반정이다. 이전의 [[태종(조선)|태종]], [[세조(조선)|세조]], 훗날의 [[인조]]도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왕족이 반정을 주도했다. 반면 중종은 가만히 있다가 신하들에 의해서 옹립되었다. 중종은 [[성종(조선)|선왕]]의 적자이다. [[연려실기술]]에서 중종반정을 기록한 부분을 보면 반정이 일어난 날에야 비로소 반정군에 참여하여 살아남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다. 당시 왕과 극소수의 최측근을 제외한 조정의 신하들 사이에 '[[이 자식 안 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분위기가 퍼져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왕과 극소수의 최측근만 제거당하고 대부분의 부패한 인물들이 그대로 남게 되었다는 문제도 있었다. 그래도 의외로 이들은 권신치곤 빨리 사라졌다. [[유자광]]의 경우 [[무오사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과거 때문에[* 사실 이건 부스터에 지나지 않고 시작은 창녕, 고성의 수령이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는데 이때 내려진 구언의 전교에 유자광이 이 두 수령을 변호하자 이에 대간이 반격한 것이 시작이었다. 뭐, 애초에 유자광은 진작에 찍혀있었긴 했지만 어쨌든 그게 계기는 아니었다.] 중종 2년에 축출되어 귀양지에서 71세로 사망하였다. 유자광의 아들 두 명은 왕의 배려로 유자광의 사후 공신의 지위를 회복하였고 예를 갖추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이후 반정을 이끈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3대신이 중종 5년, 7년, 8년에 줄줄이 죽으면서 왕은 [[조광조]]를 비롯해 사림에 힘을 실어줄 수 있었다. 반정이 일어났어도 백성의 삶에 큰 변화가 없었다. 금표를 철폐했는데 왕이 금표로 빼앗은 땅의 대부분 주인은 대신이나 대간들이었다. 왕이 유흥 비용 마련을 위해 내수사를 과세 기관으로 초법적, 비공식적으로 운영하던 것을 중종 시기에 공식 기관으로 인정하였다. [[불교]] 탄압도 그대로 이어졌다.~~이건 뭐 개국 초부터 하던거고...~~ [[연산군]] 시기에 백성에게 가장 큰 부담이 되었던 것은 공물이었다. 본래 토지세인 전세와 개인 현물세인 공물, 노동력 제공인 역으로 이루어져 있는 세금체계에서 가장 비중이 높았던 것은 [[전세]]였다. 그런데 연산군 시기 사치스런 생활을 위해 공물의 양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백성의 부담이 크게 늘었다. 무엇보다 공물은 재산의 다과라 할 수 있는 토지와 관계없이 개인당 부과되는 [[인두세]] 같은 개념이었기 때문에 빈한한 계층일수록 공물에 부담이 컸다. 공물 문제를 해결해야 했지만 반정 이후로도 이러한 공물 과다 수취는 개선되지 않았다. 늘어난 재정에 따라 이미 사용처가 만들어진 상황에서 다시 없애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이를 바꾸기 위해서는 공물 대신 전세의 비중을 높여야 했고, [[조광조]]가 대공수미법을 주장했지만 [[기묘사화]]로 실권하면서 현실화되지 못했다.[* 물론 대공수미법이 실현되었다 하더라도, 당시의 미약한 시장 경제의 발달 수준, 공납을 상당부분 대신할만큼 토지 생산력이 뒷받침되었는지 여부를 고려할 때 실패할 정책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공물 과다 수취는 세조 때 [[보법]]을 실시하여 군역부담 증가로 붕괴하고 있던 [[양인]]층에 결정타를 먹였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양인의 몰락이 가속화되었고, [[임진왜란]] 이후 공물 수취의 모순이 [[대동법]]을 통해서 해결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중종도 초반에 노회한 반정공신들에게 밀려서 제 목소리를 못 냈다. 즉위했을 때 그는 열아홉 살이었다. 반정에 참여했던 [[채수]]는 자신의 소설 [[설공찬전]]에서 공신들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반정을 [[주전충]]에 빗대어 비난하는 바람에 왕을 모욕했다 하여 큰 논란이 되었다. 공신 문제는 이후 [[조광조]]의 위훈 삭제 시도와 [[기묘사화]]로도 이어진다. 반정 도중에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이었던 [[신수근]]이 살해된 것과 [[단경왕후]]의 폐위도 반정의 의의를 깎아먹었다. '''왕의 [[조강지처]]를 반정공신들이 강제로 내쫓았기 때문.'''[* 별거 아닌것 같지만 기본적으로 조강지처를 내쫓는 건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악마 비스무리하게 취급'''된다. 그걸 또 강제로 내쫓았으니...] 그래서 반정공신들 3인방은 [[배향공신]]에서 파내자는 상소가 [[순조]] 때까지 올라왔다. 심지어 이 3인방도 폭군을 몰아낸 충신(?)치고 대부분 행적이 나빠서 성희안만 빼면 욕을 먹고 그나마 성희안만 안 먹지만 그도 자기 친인척을 공신에 슬쩍 끼워넣은 일이 있다. 그리고 일본 [[센고쿠 시대]]의 오우치 가문와 몇몇 다이묘 가문들에게는 조선에서 무역을 통제하기 시작하며 이익이 줄어들게 된다. 이에 [[오우치 요시오키]]는 자신이 백제 왕의 후손임을 내세워[* 족보상 [[임성태자]]의 후손이었다.] 특혜를 받으려 했으나 실패한다. 이는 [[삼포왜란]], 닝보의 난으로 계기로 센고쿠의 오우치 가문이 몰락하게 되는 시발점이 된다. 군약신강의 시대가 중종반정 이후부터 지속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