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종반정 (문단 편집) == 중국의 기록 == [[명사(역사책)|명사]]에서 정덕 2년 12월 9일에 보고가 올라온다. 내용은 이렇다.[[http://sillok.history.go.kr/mc/id/msilok_008_0330_0010_0010_0080_0020|출처]] >[[정덕제|정덕]] 2년 융(연산군)이 [[폐세자 이고|세자 고]]가 어린 나이로 죽은 것을[* 그런데 세자를 죽인 것은 반정 공신들이다.] 몹시 슬퍼하다가 병을 얻었으므로 국사를 아우인 이역(중종)에게 넘겨주겠다고 주청해 왔고, 그 나라 사람들 역시 이역을 왕으로 봉하여 주기를 주청해 왔다. > >예부에서 이를 의논하여 역에게 [[섭정|국사만을 맡게 하고,]] 융이 졸하기를 기다렸다가 국왕으로 봉해주기로 하였다. 앞서 배신[* 신하의 신하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조선의 신하를 가리키는 말. 당시 공식적으로는 조선 국왕이 명 황제의 신하이므로, 조선의 신하는 명 입장에서는 명 황제 신하의 신하, 즉 배신이다.] 노공필 등이 조공하기 위해 수도에 와서 역을 봉해주기를 거듭 주청하였었는데 조정의 의논으로 윤허하지 않은 적이 있었다. 12월에 융의 대비(정현왕후)가 역은 나이도 들었고 현명하니 중임을 맡겨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주하였다. > >이에 예부에서, “융은 고질병으로 왕위를 사퇴하였고, 역은 친동생으로서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 이미 명백한 사실이니, 우애를 지키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그 나라의 모든 신민들도 한결같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그들의 청원대로 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상주하였다. 황제는 이에 융의 [[선양|선위]]를 윤허하고, 내관을 파견하여 국왕 책봉의 칙명과 아울러 그 비 윤씨([[장경왕후]])의 고명을 내렸다. >---- >《[[명사(역사책)|명사]]》 권320, 열전제208 外國一 朝鮮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