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즈엉반민 (문단 편집) == 생애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띠엔장성에서 태어나 [[사이공]]의 [[프랑스]]가 설치한 학교에서 공부한 후 1940년 [[프랑스군]]에 입대했다. 1945년에는 [[일본 제국]]이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전복하는 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그는 포로로 붙잡혔다. 이때 그는 [[일본 육군]] [[일본 제국 육군/헌병|헌병]]에게 구타당해 [[치아]]가 하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전후에도 그는 프랑스군에서 복무하다가 1952년 [[베트남국]]의 군대인 베트남 국가군에 입대한다. 55년 초 사이공의 경찰권을 장악하고 있던 군벌 빈쑤옌을 토벌하던 [[사이공 전투]]에서 활약했다. 1955년 베트남국은 [[베트남 공화국]]으로 바뀌게 되었고 그는 [[베트남 공화국군]]에서 복무를 계속한다. 이때 응오딘지엠이 종교파 세력을 배신하고 무자비한 숙청을 시작했는데, 공화국군 소속이었던 즈엉반민 역시 종교파 토벌에 동원되게 된다. 특히 56년에 있던 호아하오교 토벌전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특별히 즈엉반민이 잘 싸워서 이긴 건 아니었고.그냥 공화국군의 숫자가 호아하오교의 군대의 숫자를 압도해서 승리한 것이다.[* 영어 위키백과 즈엉반민 문서에 따르면 [[레꽝빈]] 장군이 이끌던 호아하오군의 숫자가 약 3,000명, 공화국군은 약 20,000명이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승전은 승전이었고, 군부에서 그의 지위도 드높아졌다. 1960년 쿠데타 당시에는 쿠데타 진압을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쿠데타군에 참여하지도 않는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1963년 그는 [[미국 중앙 정보국|CIA]]로부터 [[응오딘지엠]] 정부가 전복되어도 반대하지 않을 거라는 통보를 듣고 응오딘지엠을 실각시키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그날 응오딘지엠은 총을 맞아 암살되었으며 이후 [[군정]]을 선포하고 [[군사정부]]의 수반임을 자처했으나나 즈엉반민은 [[베트콩]]과의 대결보다는 화해를 추구했고, 이는 결국 미국이 [[응우옌카인]]의 쿠데타를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응우옌카인의 쿠데타에 의해 실각했다. 실각된 이후에도 어느 정도의 권력은 유지해서 응우옌카인과 권력 다툼을 하기도 하여 자주 정부의 수반에 올랐다가 실각했다가 하다가 1964년 12월 19일 응우옌카인의 쿠데타가 일어나[* 명목상 수반은 판칵스우였다.] [[태국]] [[방콕]]으로 망명했다. 쿠데타 당시의 [[미국]] [[미국 중앙 정보국|CIA]]의 친분을 이용해 베트남에 돌아가려 했다. 이후 1968년 귀국했고 1971년 대선에서 [[응우옌반티에우]]와 대결하지만 결국 실패했다. 한편 베트남 공화국에선 [[미군]]이 철수하고 1973년 [[북베트남]]과 [[베트콩]]과 파리 평화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1975년 3월 [[북베트남]]은 이 협정을 깨고 베트남 공화국을 침공했다. 1975년 4월 21일에는 응우옌반티에우 총통이 [[대만]]으로 망명했고, [[쩐반흐엉]] 부총통에게 권력을 이양하지만 [[북베트남]]과 평화 협정을 북베트남 측이 거절하자 그는 4월 28일 총통직에서 물러나고 즈엉반민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어떻게든 [[북베트남군]]을 막아보려 했지만 [[베트남 공화국군]] 장성들은 자살하거나 해외로 망명하고 있었다. 4월 30일 9시 30분경 그는 라디오 방송으로 이런 연설을 한다. >'''본인은 동포들을 대표해, 우리 베트남인들의 화해에 대한 깊은 신념으로, 불필요한 유혈을 막기 위해 민족의 [[베트남 통일|화합]]을 제의한다. 베트남 공화국 전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침착하게 현 위치에서 대기하라. 나는 또 혁명군 전사들에게 사격을 멈출 것을 호소한다. 우리는 질서 있게 정권을 이양하기 위해 이곳에서 [[남베트남 공화국|임시 혁명 정부]]를 기다릴 것이다.''' 이후 정오경 [[사이공 함락|북베트남군의 탱크가 독립궁에 진입한다.]] 북베트남군이 독립궁에 들어가자 즈엉반민은 테이블 주위에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는 '''"정권을 이양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했다. 하지만 북베트남군 장교는 '''"당신의 정권은 이미 사라졌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어떻게 넘겨준다는 거냐"며 일갈했다.''' 그날 오후 북베트남군이 지켜보는 앞에서 라디오 연설을 통해 베트남 공화국 정부는 해체되었다고 선언했다. 남베트남의 마지막 총통으로서 그의 역할은 불과 이틀 만에 끝난 것이었다. [[베트남 통일|통일]] 이후에도 [[베트남]]에 머물며 8년간 은둔 생활을 해왔고 베트남 정부도 그에게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후 1983년 망명이 허락되어 [[파리(프랑스)|파리]]로 이주했다. 1980년대 말 베트남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베트남 정부는 허락하지 않았으며 [[캘리포니아]]로 거처를 옮겼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망명 기간 동안에는 과거의 일들에 대한 것은 일체 언급하지 않았고, 회고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가 죽자 베트남 정부에서 애도를 표했다고 한다. 자신들에게 항복했고, 군사 정부 수반일 때도 베트콩과의 화해를 추구해서 딱히 자신들에게 해를 끼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