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증산도 (문단 편집) === 강일순 사망 및 분열 === 1909년, 경술국치 1년 전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해이며, [[순종(대한제국)|순종]]황제 융희 3년이기도 하다. 사망년도가 1909년이므로 강일순은 일제시대를 겪은 적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강일순이 일제시대까지 살았다고 착각하곤 한다.] 강일순은 천지공사의 종료를 선언하고 39세 나이로[* 만으로는 37세] 사망했다.[* 증산계 종교에서는 어천(御天)하였다, 즉 천지공사를 마치고 천상 보좌로 돌아갔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이로 인해 당시 강일순이 이야기한 개벽이 도래하리라 믿었던 제자들은 충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고판례는 강일순이 죽은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나, 강일순이 영적으로 나타나 자신의 죽음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이후 영적인 혼례식을 거행했다. 1911년에 차경석에게 강일순 탄신 기념 치성을 올리도록 하였다가 깨어난 뒤 강일순의 음성으로 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고판례가 강일순으로부터 도통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다시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고판례는 자신이 강일순의 계승자임을 선언하고, 전라남도 정읍군(지금의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에서 종교성이 매우 강한 집단을 이루었다. 교단명은 공식적으로 정한 바 없으나 내부에서는 선도교(仙道敎)라는 말을 사용한 듯하다. 그러나 고판례의 이종사촌인 차경석과 고판례는 함께 할 수 없었다. 차경석은 이미 동학운동에 깊게 참여했던 명망 있는 사람이었고, 그 자신의 개인적인 카리스마 또한 막강했다. 차경석은 교단 운영에 있어 고판례를 철저히 배제하였고, 고판례는 차경석을 떠나 조종리에서 두 번째 교단을 꾸렸다. 이후 이상호가 보천교에서 분열해 나와 동화교를 차릴 때 고판례를 받들었으나 이상호 또한 교단 운영에서 고수부를 배제하였다. 이에 고수부는 다시 동화교를 나와 오성산에서 은거하다 1935년 사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