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지둥방공자치정부 (문단 편집) == 군대 == 지둥방공자치정부는 보안대[* [[북양정부]] 당시의 경찰의 역할을 한 지방 무장부대를 이르는 말]와 경찰, 민단[* 지방 지주의 자체 무장단체]을 합쳐 족히 10만 명이 넘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보안대는 총 1만 5천명 정도로 이루어져 있으며, 5개의 조로 나뉘어 행동하였다. 36년 8월 이후에는 4개 부대와 1개의 교도대[* 교육대를 이르는 말]로 개편되고, 간부 훈련소가 부설되었다. 1개 부대당 약 3,500명의 병력으로 이루어졌고, 각 부대는 2개 팀으로 구분하여 기관총, 야포, 소화기, 기마병, 통신과 같은 특기로 구분된 3개 일반병들의 대대와 간부 2개 중대로 구분하였다. 경찰은 총 1만 2천명 정도로, 자치정부 수립 이전의 경찰들이 대부분 기용되었다. 민단이 나머지를 이루고 있었으며 1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 숫자를 이루고 있었는데, 민단은 각 현, 촌등에서 결성한 [[민병대]]의 규모를 모두 합친것이다. [[만주국]]이 5백만 위안 정도의 지원을 하기도 하는 등 자치정부는 영내의 경찰력과 병력의 양성에 애썼다. 일본 또한 자치정부가 더 많은 병력을 양산할 수 있도록 고문단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와 반대로 민간의 총기 소지를 전면적으로 금지하여 반일 무장 사조직의 발호를 막으려고 하였다. [[퉁저우 사건]]이후 그들은 일본군을 도와 [[중국 공산당|공산당]], [[중국 국민당|국민당]]을 포함한 반일 무장 단체을 진압하였다. 철도를 따라서 [[산해관]]등의 주요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은 약 3,000명에 달하였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베이핑-톈진 전투]] 와중에 일본 육군항공대의 오폭으로 보안대에서 사상자가 발생하자 일본군의 만행에 불만을 품고 있던 보안대가 1937년 7월 29일, 통주 사건을 일으켜 200명의 일본인과 조선인을 학살하고 [[인루겅]]을 체포하기도 하였으나 일본군 1개 연대의 개입으로 진압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