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지옥(기독교) (문단 편집) == 보복의 장소? == [[기독교]]가 한때 박해받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파된 종교라서 그런지, 기독교 계통의 지옥을 묘사한 그림은 거의 공통적으로 천국이 같이 묘사되고 있으며, 한결같이 천국에 있는 자들이 질서정연하게 지옥에서 괴로움에 신음하는 자들을 내려다 보고 있다. 이것은 [[성경]]에 나온 악한 부자와 거지 [[라자로#s-2]]가 각각 엄청나게 먼 거리인 지옥과 천국에 있었으면서도 서로를 볼 수 있었다는 묘사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고, 현세에서 악인들에게 시달리고 고통받던 신자들에게 위로감을 주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글귀가 2세기경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가 쓴 지옥에 관한 글. ||그 날의 광경이 얼마나 장엄할까! 난 어떤 장면에서 처음 웃음을 터트리고 박수를 치게 될까나?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지던 왕들은 그들이 올라가는 걸 지켜봤다는 그들 신들의 왕 유피테르와 함께 어두운 심연 속에 빠져 고통의 신음을 하고 있겠지. 주님의 이름을 박해한 통치자들이 용감한 기독교도들을 죽이려고 지른 불보다 훨씬 더 맹렬한 불꽃 속에서 녹아가고 있을 테지. 불구덩이에 함께 빠져 제자들 앞에서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는 현명하다던 철학자들, 세계는 [[야훼|하느님]]의 [[이신론|관심 밖에 있다는 그들의 주장]]을 추종한 자들, 애초에 [[영혼]]이란 없다고 믿거나 아님 자신들의 영혼은 본래 몸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확신했던 자들은 어떻게 될까? 유피테르의 아들 라다만튀스나 미노스의 심판대 앞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벌벌 떠는 시인들의 모습, 놀랍지 않은가? 자신들의 멜로 드라마 속에서 통곡하는 비극 배우들의 목소리는 어쨌든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 불 속에서 펄쩍 뛰는 희극 배우들이야말로 볼만할 것이다! 전차를 몰던 유명한 전사는 그의 불바퀴 위에서 구워질 것이고, 운동 선수들은 경기장에서가 아니라 불속에서 바퀴처럼 굴러갈 것이며… 이것들 모두 서커스장이나 어떤 극장, 운동경기장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신나는 일들일 거야!|| 근데 사실 이런 생각은 그리스도인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이라는게 [[성경]]의 가르침이다. 기독교 신자의 기본 자세는 '''악인 누구누구가 지옥에 가서 고소하다 낄낄'''같은게 아닌, 악인의 회개를 항상 [[기도(종교)|기도]]하면서 '''한 사람이라도 생전에 뉘우쳐서 지옥에 가지 말기를 바라야 하기''' 때문. 물론 애초에 로마제국 시대의 박해받는 기독교인 및 [[순교]]에 감동해서 개종했고, 방어적 호교론의 달인에다 나중에 몬타누스파 [[이단]]에 빠질 정도로 성격이 불같았던 테르툴리아누스의 성격을 감안해서 이해해야 하겠다. 그러나 이는 '죄'의 개념을 상식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며. 성경에서 죄는 수직적인 것으로,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한 것이 우선시된다. 신으로부터 스스로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말까지 들었던 다윗이 충성스러운 장군 우리야를 남의손을 빌려 죽이고 그 아내와는 간통하여 아이를 낳고 은폐하고자 기도하였다. 이는 어지간한 막장드라마 못지 않은 큰 죄악이었지만 그는 회개기도에서 '제가 오직 주님 앞에 죄를 지었사오나' 라고 하는데, 이는 다윗이 우리야나 그 아내에게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죄로 인해 가장 크게 모욕을 입은 이가 계명을 무시당한 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길게 살아봐야 100년 동안인 사람이 죄를 그동안 지은 것을 가지고 어떻게 영원한 벌이 합당한가? 과도한 잔혹함(overkill)이 아닌가?' 에 대한 성경의 대답이 이것으로, 비유하자면 물건을 파손할 경우 무엇보다 그 물건의 주인에게 죄를 짓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겠다. 그만큼 하느님이 높은 분이라 죄에 대한 대가가 크다는것이다. 그리고 지극히 의로운 하느님은 인간이 사소하다고 여기는 죄 하나까지도 맹렬히 증오하고 그것을 반드시 심판한다. 죄를 하느님의 기준으로 인식하면, 지옥의 영벌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공의로운 심판인것이다. 즉 영원히 고통 받는 형벌로도 죗값을 다 못 갚아 지옥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성경의 관점에선 구원을 받지 못한 무수한 이들의 영원한 고통<<<<<<<<<<<<<<<<예수의 속죄''' 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불의에 대한 처벌을 탄원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를테면 돌을 맞고 죽은 예언자 즈카르야, 또는 묵시록의 순교자 등에 대한 일화 등이 그렇다. 하지만 위의 문단을 "우리 집에 입양한 고양이가 내가 소중히 여기는 물건을 파손했다고 해서 고양이에게 고양이가 이해할 수 없는 형벌을 내려야하는가?"로 치환해서 생각해보면 굉장히 자기중심적이고 과잉된 처벌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고양이는 내려지는 형벌만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만큼 훈련이 가능할 수도, 못할 수도 있고, 물론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문맥에 따라 케바케일 것이다. 하지만 실수 한번 할때마다 그걸 무한한 존재의 공의랍시고 감정 내키는대로 다 쌓아 올려서 형벌을 내려버리면 고양이가 배울 기회가 얼마나 될까? 둘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고양이가 집사를 더 이상 안믿고 마음을 닫아버리고 삐뚤어져 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하다 못해 현대의 [[인공신경망|인공지능]]의 학습도 수많은 실수를 하며 만들어진다. 인공지능의 실수의 크기들을 상대적으로 정량화하는 매 loss function의 반환 값마다 무한한 존재의 공의랍시고 화가난다고 무한을 더하거나 곱해 버리면 인공지능이 제대로된 학습이 가능할까? [[학습된 무기력|무기력을 학습]]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애초에 우리 인간이라도 이런 과정을 감당하지 못할거면 애초에 입양을 하지 않는게 나를 위해서도 고양이를 위해서도 차라리 현명한 선택이며, 이런 식의 변증은 그냥 말이되는 말들을 갖다 붙여 그 상황에서만 말이 되게 만들고 대충 넘어가버리는 책임없는 애드혹 논증으로 밖에 보여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위와 같은 논증은 하나님은 무한히 큰 존재이므로 그가하는 행동이나 가치관의 '거칠음' 혹 '비정밀도' 역시 무한히 커지고, 따라서 그 역수인 '섬세함' 혹 '정밀도'는 무한히 떨어진다는 자기모순적인 얘기 밖엔 안된다. ~~하나님의 심판이 늘 [[김홍도(목사)#s-6.3|광역기]]인 이유~~ 그리고 성경에는 정작 위에서 말한 "성경에는 불의에 대한 처벌을 탄원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하는데.."의 정 반대도 경우들도 있다. 예수의 죽음이나 스데반의 순교 같은 경우일 것이다. 예수의 경우 자신의 핍박자들의 무지를 이해하고 용서하기를 원했고[* [[https://www.bible.com/ko/bible/88/LUK.23.34.KRV|누가복음 23:34]] ], 사도행전의 스데반의 경우 돌을 맞으며 죽는 상황에서까지 자신의 핍박자들을 용서하고 싶어했다[* [[https://www.bible.com/bible/88/act.7.55-60.KRV|사도행전7:55-60]] ]. 더구나 위에서 언급된 "묵시록의 순교자" 중에는 스데반도 있을텐데, "기독교의 첫 순교자라고 알려져있는 스데반이 그때에는 처벌을 원할까?"에 대한 대답은 비신자들이 대답해줄 수 없는 기독교인들의 믿음의 문제일 것이다[* [[http://kcm.co.kr/bible/kor/Rev20.html|계 20:4]]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