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직봉풍전쟁 (문단 편집) == 배경 == [[펑위샹]]은 원래 [[우페이푸]] 휘하의 육군검열사였으나 우페이푸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이에 [[봉천군벌]]의 수령인 [[장쭤린]]과 내통, 1924년 [[2차 직봉전쟁]] 중 [[북경정변]]을 일으켜 베이징을 점령하고 대총통 [[차오쿤]]을 하야시킴으로 우페이푸 밑에서 나와 대군벌로 성장하게 되었다. 펑위샹은 베이징에서 국민군을 조직, 1924년 10월 25일 국민군 총사령관 겸 제1군 군장에 취임하였다. 그 산하에는 [[후징이]]의 2군, 손악의 3군이 있었다. 하지만 [[장쭤린]]은 산해관 이남으로 진출하지 않겠다는 펑위샹과의 밀약을 무시하고 대군을 거느려 베이징에 입성하였으며 [[리징린]]이 직예독군 왕승빈이 편성한 23사단을 무장해제하고 왕승빈을 톈진 조계지로 내쫓아 하야를 강요했으며 손직부의 20사단 역시 무장해제시킴으로 펑위샹을 강압적으로 직예성에서 몰아내려고 했다. 이에 분노한 펑위샹은 장쭤린이 마적 기질을 버리지 못했다고 욕설을 퍼부었으나 전력상 열세라서 참을 수밖에 없었다. 국민군 2군 사령관 호경익은 아예 선수를 쳐서 장쭤린과 장쉐량을 체포해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펑위샹은 이 역시 거부했다. 장쭤린 역시 펑위샹을 싫어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며 [[우광신]]은 국민군 3군 사령관 손악을 공산주의자로 몰기도 했다. 장쭤린은 펑위샹이 베이징에 초청한 [[쑨원]]도 무시하고 [[돤치루이]]를 집정으로 추대했으며 강남으로 공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결국 1925년, [[쑨촨팡]]이 [[직계군벌]]의 잔여세력을 규합하여 [[손봉전쟁]]을 일으켰고 장쭤린은 크게 패해서 황하 이북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펑위샹은 쑨촨팡과 비밀리에 내통하면서 자신의 지배영역으로 봉천군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한편, 우페이푸의 세력이 남아있던 하남성에서는 국민군 2군 사령관 후징이와 섬서군벌 유진화가 힘을 합쳐 우페이푸의 잔여세력을 몰아냈다. 후징이는 그 공으로 하남독군에 임명되고 유진화의 부하 감옥곤은 예섬감초비부사령관에 임명됐는데 감옥곤은 하남독군이 되기 위해 후징이를 상대로 호감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후징이는 승리했으나 국민군은 하남성에서 우페이푸 세력과도 더욱 척을 지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