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직봉풍전쟁 (문단 편집) === 신정부의 조직 === 한편 장쭤린은 우페이푸에게 [[베이징]]의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우페이푸에게 맡기겠다고 약조한 바가 있었다. 이에 우페이푸는 [[옌후이칭]]을 국무총리에 복직시키고 차오쿤 헌정을 복고하려 했다. [[쑨촨팡]]도 갑자기 우페이푸를 옹호하면서 4월 20일, 전문을 보내 옌후이칭 내각의 복직을 청하였다. 허나 장쭤린은 [[2차 직봉전쟁]] 당시 봉천군 토벌 명령을 내린 바가 있는 옌후이칭 내각에 불만이 많았고 대신에 약법을 부활시키고 자신의 인척인 [[진윈펑]]을 국무총리에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우페이푸가 치셰위안, 왕회경을 파견하여 장쭤린이 장쉐량, 리징린, 장쭝창을 파견하여 4월 25일 베이징 회의를 개최하였으나 어떤 결론도 도출하지 못했다. 4월 26일, 장쉐량은 심양으로 돌아와 장쭤린에게 남구의 국민군을 격파한 후에 정치문제를 논하자고 건의함으로 논의는 잠시 미뤄졌다. 5월 1일, 우페이푸는 병이 있어 사직한다고 선포하는 한편 국무원이 회복되었으며 법에 따라 대총통이 직무를 수행한다는 기습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는 차오쿤 헌정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장쭤린은 크게 분노하였다. 5월 2일, 장쉐량이 베이징으로 내려왔고 5월 3일, 치셰위안에게 각성 정치회의를 소집하고 그 의견을 우페이푸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또한 다음 내각의 적임자로는 진윈펑이 적격이라는 언론전을 벌이게 하였다. 5월 3일, 쑨촨팡은 자신이 지배하는 5성의 군벌들과 연명으로 우페이푸에게 북상을 촉구하며 대권을 주재해달라고 청했다. 5월 5일, 봉천군벌의 원로 [[왕스전]]과 조이손이 옌후이칭을 일단 복직시키고 그 다음에 대총통을 뽑자는 절충안을 내놓았고 장쭤린은 이에 마지못해 동의하고 우페이푸에게 자신은 이견이 없으니 우페이푸가 알아서 주관하라고 하였다. 우페이푸는 장쭤린의 립서비스를 진담으로 알아듣고 옌후이칭을 복직시켰고 5월 9일, 옌후이칭은 복직을 수락하였다. 5월 12일, 옌후이칭의 복직이 정식으로 선포되었고 5월 13일 내각을 조직하였다. 옌후이칭 내각에서 육군총장 [[장징후이]], 내무총장 정겸을 제외하고는 모두 직계의 인물이었다. 5월 14일, 장쉐량, 장쭝창이 심양에서 고급 장령회의에 참석했다. 장쭤린은 이 회의에서 옌후이칭 내각을 보이콧할 것을 지시했다. 6월 4일, 장쭤린이 산해관을 넘어 6월 5일 톈진에 도착하여 봉계 장령회의를 개최하였다. 6월 8일, 우페이푸의 대표 장기황, 장지담이 톈진에서 장쭤린의 대표 정겸, 장징후이와 만나서 회담을 가졌다. 봉천 측은 옌후이칭 내각에 반대하며 풍군 토벌 비용 4천만원과 직노연군의 군비 3천만원을 정부에서 마련해줄 것을 청하였다. 6월 9일, 양위팅이 회담에 합류했고 양위팅은 위익삼의 국민군 4군 장비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6월 22일, 옌후이칭 내각의 첫번째이자 마지막 국무회의가 개최되었고 이 회의는 옌후이칭의 사직을 결정하고 [[두시구이]]를 내각총리 대리로 선출하였다. 또한 두시구이의 대리내각은 우페이푸와 장쭤린의 입경을 환영한다는 선언을 발표했다. 6월 26일, 장쭤린과 우페이푸 사이의 순승왕부 회의를 위해 장쭤린이 입경하였다. 헌병, 보안대, 보병 3단이 직봉 양측의 측근들을 호위하기 위해 배치되었으며 봉군 여단장 부쌍영이 동부역에 임시 계엄사령관에 취임, 장쭤린 경호를 맡았다. 장쭤린은 기차에서 내린 후 50여대의 차량에 수행원들과 나눠타고 순승왕부로 향했다. 6월 27일, 우페이푸가 44량의 특별차량을 타고 바오딩을 출발, 28일이 길일이라는 장지황의 주장에 따라 장신점에서 하루 묵고 6월 28일 입경하였다. 6월 28일 오전 9시 30분, 장쭤린이 우페이푸를 예방하여 20여분 대화한 후 12시에 우페이푸가 순승왕부에 답방을 왔다. 두 사람은 일단 두시구이 내각을 승인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어 우페이푸와 장쭤린은 거인당에서 두시구이 총리가 개최한 축하연에 참여했다. 이때 큰 소리가 나서 잠시 소동이 벌어졌으나 알고보니 [[구웨이쥔]]이 옷걸이에 걸어놓은 대례모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이날 밤 우페이푸는 바로 장신점으로 돌아갔고 6월 29일, 장쭤린도 톈진으로 돌아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