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고구려) (문단 편집) == 생애 == >▨▨군(郡) 신도현(信都縣) 도향(都鄕) 중감리(中甘里) 사람이며 [[석가모니|석가문불]](釋迦文佛)의 제자인 ▨▨씨(氏) 진(鎭)은 역임한 관직이 건위장군(建威將軍)·국소대형(國小大兄)·좌장군(左將軍)·용양장군(龍驤將軍)·요동태수(遼東太守)·사지절(使持節)·동이교위(東夷校尉)·유주자사(幽州刺史)였다. 진(鎭)은 77세로 죽어, [[영락]](永樂) 18년 무신년(戊申年; 408년) 초하루가 신유일(辛酉日)인 12월 25일 을유일(乙酉日)에 (무덤을) 완성해서 영구(靈柩)를 옮겼다. [[주공단|주공]](周公)이 땅을 상(相)하고 [[공자]](孔子)가 날을 택했으니 [[무왕(주)|무왕]](武王)이 시간을 선택했다. 날짜와 시간을 택한 것이 한결같이 좋으므로 장례 후 부(富)는 7세(七世)에 미쳐 자손(子孫)은 번창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위(位)는 후왕(侯王)에 이르도록 하라. 무덤을 만드는 데 만 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동물)|양]]을 잡아서 [[술]]과 [[고기]], [[쌀]]은 먹지 못할 정도이다. 아침 식사로 먹을 소금과 장을 한 창고 분이나 보관해 두었다. 기록해서 후세에 전하며, 이 무덤을 방문하는 자가 끊어지지 않기를. >---- >'''덕흥리 벽화 무덤 묵서명'''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5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gskh&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gskh_001_0020_0040_0090&position=-1|출처]] 이것이 그의 생애에 대하여 전해지는 기록의 전부이다. 이마저도 형식적인 수사로 채워져 있어 구체적인 삶은 알기 힘들지만[* 대신 출신지, 생몰년, 경력이 완벽하게 적혀있다. 대부분의 한국 고대 인물들이 기록의 부재로 출신지, 생몰년, 경력을 알 수 없는 경우와 대비된다. 하지만 적혀있는 출신지에 비해 최초 국적이나 성씨를 알 수 없으니 이것 아이러니이다. 희한하게도 다른 기록은 거의 멀쩡한데 최초 국적을 가늠할 수 있는 군의 이름과 복성인 성씨만 지워져있다.] 덕흥리 벽화 무덤의 규모와 그가 거친 관직으로 보건대 고구려 지도층 중에서도 정상급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임명한 제후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해당 묵서명에 따르자면, 진은 330년 혹은 332년에 태어나 406년 혹은 408년에 사망했다. 330년은 고국원왕 즉위년, 332년은 [[고국원왕]] 2년에 해당하고 406년은 [[광개토대왕]] 16년(영락 16년), 408년은 [[광개토대왕]] 18년(영락18년)에 해당한다. 이렇게 출생과 사망 연도를 두 개로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진이 사망한 연도가 408년인지, 장사 지낸 해가 408년인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북사(北史) 등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의 장례 풍습은 3년 상이지만 3개월 이내에 장사를 지내고 3년 간 상복을 입는 중국식 3년상과 달리 3년 동안 시신을 모셨다가 장사 지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진의 장례가 408년 고구려의 풍습에 따라 치러진 것이라면 진의 사망 연도는 406년이 되고 출생 연도도 2년 더 올라가게 된다. [[모두루]]와 달리 진에게는 성씨가 있었고 복성인 것까지는 확인되나 지워져 무슨 성씨였는지는 알 수 없다. 보통 그 무렵 고구려와 한창 치고박았으며 요서~요동을 점거하고 있던 [[후연]]의 황성인 모용씨가 보통 성씨 후보로 많이 제기되었으나 가능성은 낮은 게, 사서상에 기록된 [[남연]]의 모용진이 고구려의 진이 아닌가 하는 설이 제기된 적이 있었지만 둘의 행적이 확연히 다르므로 모용씨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 진은 다른 중국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지만, 상기한 덕흥리 고분의 발견으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덕흥리 고분의 묘지명에 의하면 □□군 신도현 도향 □감리에서 태어나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용양장군 요동태수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의 관직을 역임했다. 건위장군으로 관료에 데뷔하여 유주자사로 마감한 것. 77세[* 고대인의 평균 수명이 40세 정도임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장수했다. 그가 고구려인이라면 젊어서는 고국원왕대의 쇠락을 지켜보고 늙어서는 광개토왕대의 위상을 지켜본 것이다.]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영락 18년(408년) 12월 25일에 안장되었다. 묘의 규모로 보나 묘지명에 '부(富)는 7세(七世)에 미쳐 자손(子孫)은 번창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위(位)는 후왕(侯王)에 이르도록 하라. 무덤을 만드는 데 만 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아서 술과 고기, 쌀은 먹지 못할 정도이다. 아침 식사로 먹을 간장을 한 창고 분이나 보관해 두었다.'라는 기록으로 보건대 상당한 위치의 인물로 추정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