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고구려) (문단 편집) == 진의 정체? == 진과 관련해서는 크게 두가지 논쟁이 있는데, 첫째는 '''그의 출신국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그가 최종적으로 역임한 관직인 '''유주자사의 정체'''에 대한 것이다. 일단 유주라는 곳은 현 [[베이징]]의 옛 지명인데, 진이 고구려인으로 그곳의 자사를 지냈다면 이 당시 '''고구려가 베이징 일대를 다스렸다'''는 주장이 이론적인 가능성을 얻게 된다. 물론 현재 (북한을 제외한) 한중일 사학계에선 이 당시 고구려가 베이징을 다스렸다는 주장을 하는 학자는 없다. 진의 출신 성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한국학계와 일본학계 및 중국학계에서는 진의 출신을 중국계 망명자로 보는 시각이 우세한 편이며, 이에 반해 북한학계에서는 고구려 출신으로 보는 시각이 다수인 편이다.[* 일각에서는 덕흥리 고분군의 구조가 중국 지역의 고분과는 다르다는 이유를 들면서 그를 고구려인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고분의 형태는 사실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백제 무령왕의 경우처럼 전형적인 중국 남조식 벽돌무덤에 매장된 케이스도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진이 사망한 광개토왕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고구려의 전통적인 묘제는 집안 일대에 밀집한 돌무지무덤, 즉 적석총에 가깝지, 벽화고분은 고구려와 중국의 묘제가 서로 혼합된 양상을 띄고 있다.] 일반적으로 북한학계의 주장은 조금 무리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진의 출신지를 중국으로 보는 중요한 근거는 묵서명에 묘사된 그의 출신지이다. 그에 따르면 그는 "▨▨군(郡) 신도현(信都縣) 도향(都鄕) 중감리(中甘里)"[* 중국 기주의 치소인 장락군 신도현을 가르키는 듯 싶다.]에서 태어난 사람인데, 여기서 보이는 지명에 대한 묘사는 당시 고구려의 지방제도와는 다른 중국 군현제와 흡사한 구조를 띈다. 광개토왕비문을 비롯한 고구려 당시의 지명을 보면, 이때까지 고구려에서 중국적인 군현제가 실시된 흔적은 보이지 않고 도리어 성(城) · 촌(村)을 비롯한 고구려 고유의 지방제도가 실시된 흔적이 보이는데, 진의 출신지에 대한 묘사와는 꽤 이질적인 면모가 있다. 이에 대하여 북한학계에서는 《고려사》 지리지에 "가주(嘉州)는 본래 고려의 신도군(信都郡)이다(嘉州本高麗信都郡)"라는 구절이 있다는 점을 들어서 진의 출신지를 고구려로 비정하고 있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한국과 일본 및 중국학계에서는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더욱이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어떤 지역의 연혁을 설명할 때에 "본래 고려의 땅이다"라는 구절과 "본래 고구려의 땅이다"라는 구절이 확연히 나뉘어져 있다. 때문에 몇몇 학자들은 이 구절에 대하여 신도군은 고구려 시대의 지명이 아니라 고려 시대의 지명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묵서명의 기록에 따르면 진의 매장지를 정하기 위해 주공 단과 공자, 주 무왕 등의 중국 위인들에게 점을 쳤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점도 그가 본래 중국 출신이었다는 의혹을 강화하고 있다. 한편, 진이 역임했던 직위의 성격 또한 학계에서 많은 논쟁이 이뤄지고 있다. 한국학계의 다수설을 먼저 설명하자면, 진이 비록 중국계라고는 하지만 그의 묵서명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연호인 "영락"이 표기되어 있고, 그가 역임한 관작에도 전형적인 고구려풍 관등인 "국소대형"이라는 관등이 있어 그가 종국에는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묵서명에 보이는 유주 군현의 구조도 기존 중국의 것과는 다른 것이기에 고구려로부터 유주자사라는 관직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다만 그 유주자사라는 것이 실직이라기 보다는 허직에 가까운 것이며, 만일 실직이었다고 하더라도 오호십육국 당시의 혼란상에 따라 이치된 교군을 다스리는 것으로 그 지배영역이 중국 유주 일대 전체를 포괄한다고 보긴 어렵다는 견해가 주를 이룬다. 반면 긍정하는 쪽은 [[모본왕]], [[태조왕]]때 이미 베이징, 톈진 지역인 상곡, 어양, 태원을 공격하고 정벌했다는 기록과 [[고국원왕]], [[광개토대왕]]때 유주에 진출했다는 기록이 있고, 관직 마지막에 유주 자사를 지낼때 유주 자사 관할하에 있는 고구려 13태수들이 정무 보고를 하고 있는 벽화가 있으며 고구려 제후왕의 기록까지 있기 때문에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진 관할하에 있던 13개 태수의 위치는 무덤벽면에 사신들 우측에 쓰여 있다. (1) “연군(燕郡) 태수” (2) “범양(范陽) 내사” (3) “어양(漁陽) 태수” (4) “상곡(上谷) 태수”(5) “광령(廣寧) 태수” (6) “대군(代郡) 내사” (7) “북평(北平) 태수” (8) “요서(遼西) 태수”(9) “창려(昌黎) 태수” (10) “[[요동군|요동]](遼東) 태수”(11) “현도(玄도) 태수” (12) “[[낙랑군|낙랑]](樂浪) 태수”(13) “(판독 불능)” 일본학계와 중국학계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진이 지냈다는 유주자사를 허직으로 보는 편이며, 북한학계에서는 고구려가 오호십육국의 혼란상을 틈타 실제로 중국 유주에 진출하여 그 지역에 군현을 설치했으며, 그 흔적이 덕흥리 고분분의 묵서명에 남았다고 보는 편이다. 다만 북한학계에서도 고구려가 유주를 장기적으로 지배했을 가능성은 낮으며 길어도 몇 년 동안의 일시적인 지배에 그쳤을 것이라 추정하는게 다수설이다. 여담으로 북한 역사 교과서 [[조선력사]]에선 이런 견해를 받아들였는지 갑론을박이 있지만 어쨌든 고구려 영토를 남한 역사 교과서보다 많이 설정해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