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성씨) (문단 편집) === 남원 진씨(南原 晋氏) === 시조: 진함조(晋含祖) 국가에 대사(大事)가 있으면 [[현종(고려)|현종]]이 매번 그에게 도참(圖讖)으로 질의(質疑)하였는데 술수(術數)로 크게 기용되어 관직이 내사시랑(內史侍郞)에 이르렀다. 그의 후손 진석(晋錫)이 고려 고종 때 거란군의 침입을 크게 무찌른 공으로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지고 남원(南原)을 식읍으로 하사 받아 후손들이 그곳에 정착, 세거하며 본관을 남원으로 하게 됐다. 인구는 2015년 기준 7,128명이다. 과거 급제자로는 958년([[고려]] [[광종(고려)|광종]] 9) 향공진사(鄕貢進士)로서 무오방(戊午榜) 문과에 명경(明經) 1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KM_5COa_0958_000003|급제해]] 광문원 소감(光文院少監)에 오른 진긍(晉兢)이 있었고, 1705년([[숙종(조선)|숙종]] 31) 어모장군(禦侮將軍) 행(行) 충좌위 부사과(行忠佐衛副司果)로서 식년 무과에 병과 35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U_6JOb_1705_150043|급제한]] 진수창(晉壽昌, 1661 ~ ?)과 1725년([[영조]] 1) 부사과(副司果)로서 증광 무과에 병과 136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U_6JOc_1725_003602|급제한]] 진영찬(晉英纘, 1690 ~ ?)이 있었다. 두 사람은 부자지간으로 당시 거주지는 모두 [[한성부]]였으며, 진수창의 자는 여장(汝長), 진영찬의 자는 찬징(纘澄)이었다. 진수창의 아버지는 별파진(別破陣) 진기룡(晉起龍)이었고 아래로 진이창(晉二昌)·진세창(晉世昌)·진명창(晉明昌)·진만창(晉萬昌)·진우창(晉祐昌) 등 5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또한 1860년([[철종(조선)|철종]] 11) 유학(幼學)으로서 정시(庭試) 문과에 을과 2위, 즉 탐화랑(探花郞)으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60_013244|급제해]] 1866년(고종 3) [[성균관]] [[박사]](정7품)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03_02A_28A_00170_2004_013_XML|오른]] 진명복(晉命復, 1819 ~ ?)[* 1864년(고종 1) 1월 9일 진창복(晉昌復)으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01_01A_09A_00100_2004_001_XML|개명했다]].]과 1885년(고종 22) 유학으로서 식년 [[진사|진사시]]에 2등 2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85_037226|입격한]] 진창욱(晉昌旭, 1837 ~ ?)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당시 거주지가 [[전라도]] [[남원시|남원도호부]](南原都護府)였고, 진명복의 아버지는 진정표(晉廷表), 조부는 진순응(晉順應), 증조부는 진방한(晉邦漢)이었다. 진창욱의 자는 희백(希伯), 아버지는 학생(學生) 진기문(晉璣文)이었고, 아래로 진태욱(晉台旭)·진경욱(晉慶旭)·진철욱(晉喆旭)·진관욱(晉寬旭) 등 4명의 남동생이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