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희성) (문단 편집) == 역사 == [[주나라]](周) 왕실과 [[동성 제후국|동성인 희(姬)성 제후]]로 작위는 [[후작]]이었으며 동천 이전 분봉 초기부터 이미 [[노나라]](魯), [[송(춘추전국시대)|송(宋)나라]]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중원의 대제후 중 하나였다. 시조는 당숙 우(唐叔 虞)로 아주 어릴 적에 [[성왕(주)|주성왕]]이 소꿉놀이를 하면서 동생 희우에게 흙과 풀로 작위를 내린 걸 사관이 보고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장성한 후에 빼도 박도 못 하고 영지를 수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희우는 진나라의 시조로서 당숙 우라고 불린다. 서주 시대의 기록은 많이 산일했으나, 유물에 남은 명문들을 분석해 보면 서주 중후기 주왕실의 힘이 점차 쇠해가고 노나라, [[제(춘추전국시대)|제나라]] 등 서주 초기의 주요 제후들이 이탈하는 경향을 보일 적에도 진나라는 주나라 편에 서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진목후가 죽자 원래는 아들 후자 구[*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진목후가 길한 이름을 둘째 성사([[成]][[師]])에게 주고, 불길한 이름을 첫째 구([[仇]])에게 주었기 때문에 둘째가 첫째를 몰아내려 할 것이라고 예언한 사람이 있었고, 실제로 후에 후자 구의 후손인 진민후는 성사의 후손인 진무공에게 죽음을 당하고 후위도 뺏긴다.]가 뒤를 이어야 했지만 그의 숙부 상숙이 찬탈해 버렸다. 하지만 4년 후에 상숙을 몰아내고 후작에 오른 구, 즉 진문후는 자리를 찾게 된다. 진문후는 서주가 망하고 동주가 들어서는 혼란기에 주평왕을 도와 왕실을 다시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워 진나라의 이름을 크게 떨쳤다. 그러나 진문후가 죽은 후 진나라는 본격적인 내홍을 겪고 만다. 진문후의 뒤를 이은 아들 진소후는 진문후의 동생인 숙부 성사를 곡옥(曲沃)에 봉해 환숙이라고 일컬었다. 이때의 진나라는 수도를 익(翼) 땅에 두었으므로 익나라라고 하기도 하는데[* 원래 당숙 우가 봉해진 곳은 [[요(삼황오제)|요]] 임금의 후손의 나라인 [[당#s-3|당나라]]를 멸한 곳이므로 당이라고 하기도 한다.] 점점 익보다 환숙 성사의 곡옥이 강성해졌다. 이렇게 진나라는 익과 곡옥으로 결국 분열되었다. 환숙과 장백은 여러 번 익나라를 쳐 군주를 죽이기도 하고 익에 입성하려고 했지만 익나라 백성들의 반항과 주나라의 정벌로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다 환숙의 손자이자 장백의 아들인 칭, 즉 무공 때까지 오게 되었다. 곡옥이 훨씬 강성함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익을 접수 못한 원인은 주나라의 견제[* 천하의 질서를 위해서 천자가 존재하니...]와 백성들의 저항이라고 생각하고 이번에는 철저히 익을 공격했다. 결국 익을 점령하고 익에 있었던 진나라의 보물을 모두 주희왕(=이왕)에게 뇌물로 바치고 정식으로 진나라 군주로 인증받았다. 결국 분가가 본가를 몰아냄으로써 혼란은 종식되었다.[* 나중에 진무공의 아들 진헌공이 죽자 그의 아들들이 다시 내전을 일으키게 된 것은 업보라고 한다.] 춘추오패 중 한 명인 [[진문공]](文公) 중이의 할아버지인 [[진무공]](武公)은 내전을 마무리짓고 [[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3181|춘추시대의 초강대국으로 성장할 기반을 닦았다]]. 이 사건을 '''[[곡옥대진]]'''이라고 한다. 진무공 이후로는 사망 이후에 올리는 시호에서만 작위를 '후'에서 '공'으로 바꿨다. 생전 작위는 계속 후작. 그래서 《춘추》에서 보면 진나라 군주를 생전에는 '진후'로 칭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비슷하게 시호가 후에서 공으로 바뀐 위나라에 대한 사마정의 《사기색은》의 논리를 —대개는 《사기》 <위강숙세가>의 주석으로 찾아볼 수 있다.— 그대로 적용하면 시호가 '후'에서 '공'으로 바뀐 것은 오히려 대우가 떨어진 것에 해당한다. 진무공의 아들 진헌공 때 국운이 크게 흥성하여 인접 제후국인 곽, 위, 우와 괵을 멸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순망치한'의 고사가 우와 괵의 관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후계자를 둘러싸고 공실과 조정이 사분오열하는 내란이 다시 발발, 둘째 공자 중이[* 후일 진문공]와 셋째 공자 이오[* 후일 진혜공] 두 명은 지지 세력을 이끌고 국외로 망명하고, 적통 세자 신생은 강요에 의해 자살하는가 하면, 측실 소생의 어린 아들 혜제와 탁자가 연이어 후위를 계승하지만 두 명이 연달아 반대파 대신의 손에 암살당하는 등 그야말로 극심한 혼란상을 연출하였다. 이 혼란상은 결국 이웃한 [[진(영성)|진(秦)]]의 두 차례에 걸친 개입으로 간신히 수습되었고, 훗날의 패자가 되는 진문공, 즉 공자 중이가 최후의 승자가 되어 후작에 올랐다. 두 차례에 걸친 내전으로 진나라의 공실은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했으나, 진문공은 자신의 즉위에 공훈을 세운 신하들에게 봉토와 군권을 나눠주어 그 공백을 메꾸었다. 이에 내정이 안정된 진나라는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중원의 제후국을 위협하던 남방의 초나라를 [[성복 전투]]에서 물리치고, 강성 여씨의 제나라의 뒤를 이어 중원의 패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진문공 이후로도 진은 중원의 최강국으로서 사실상의 패권을 행사했으나[* 진에서 쪼개진 세 나라 조, 위, 한이 각각 전국칠웅의 한 자리씩을 차지했던 것을 보면, 국력을 기준으로 진나라가 사실상 춘추시대 최강대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전국시대로 들어오면서 조, 위, 한이 넓어진 것도 고려해야겠지만, 기본적으로 중원의 노른자위땅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다는 걸 명심하자.], 그 위세는 진문공 시절만 못했다. 서쪽의 이웃 진(秦)나라의 진출을 경계하느라 중원의 정세에 소홀했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문제로 봉토와 군권을 나눠받은 공신 일족들이 자신들끼리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신들의 막장 행각은 초장왕과 패권을 두고 싸웠던 [[필 전투]]에서도 볼 수 있는데, 공신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지휘 체계가 전혀 통하지 않아 각개전투를 벌인 끝에 개박살이 나고 말았다.[* 진문공 시기 초나라의 북진을 저지했던 [[성복 전투]]와 대조되는 모습인데, 성복 전투에서는 진문공을 따라다닌 공신이든 진나라에 계속 남았던 신하든 진문공이 임명한 [[선진]]의 지휘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초군을 대파했었다.] 진나라의 불행은 이렇듯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낼 공신을 컨트롤할 수 있을 만한 군주가 없었다는 점에 있었다. 진문공은 비록 자신을 수십년간 보필했음에도 불구하고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지위를 박탈하거나 목을 베어버릴 정도의 권력이 있었고,[* 대표적으로 위주와 전힐. 이 두 사람은 진문공을 따라 19년간 방랑한 신하들인데, 진문공이 즉위한 이후 방랑 시절 자신을 도와주었던 조나라의 대신 희부기를 우대해주는 것을 보고 배알이 꼴려 희부기의 집에 불을 질러서 그를 죽여버렸다. 진문공은 그 과정에서 큰 부상을 입은 위주는 벼슬에서 내쫓아버렸고, 먼저 말을 꺼낸 전힐은 사형에 처했다. 다만 위주는 성복 전투에서 공을 세워 다시 복귀한다.] 불타죽은 [[개자추]]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성깔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깐깐한 노인네였다. 이런 진문공 밑에서 굴러왔던 공신 1, 2세대들을 제어하는것은 애초부터 불가능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군 통수권자이자 초나라를 패배시킨 [[성복 전투]]의 제1 대공을 세웠던 중군 원수 선진이 진문공의 친아들 진 양공의 얼굴에 침을 뱉을 정도였으니. 문공 사후 100년 동안 8명의 군주가 즉위했고, 암군이라 공신들에게 제거당하거나[* 혹은 공신들과의 싸움에 밀려 죽은 뒤 기록이 조작되었을 수 있다. 단적인 예로 암군을 죽인 조씨 일가를 반역 행위라 기록한 사관의 경우가 있을 수 있겠다.], 너무 어린 나이에 권좌에 앉아 권위는커녕 공신들이 설칠 판을 깔아주었고 그나마 뭘 좀 해볼 만한 명군이었던 진 도공은 젊어서 죽고 말았다. 어딘가 하자있는 군주가 계속 권좌에 오르고, 바지 사장격으로 앉아있는 동안 공신들은 아귀 다툼을 벌여댔다. 그래도 강국의 기본 가락은 남아있었던지 필 전투 이후로 이를 갈고 있다가 [[언릉 전투]][* 다만 이 전투에서는 초나라의 막장성이 부각되는데, 3군 중 핵심인 중군 원수 초 공자 측(側)이 술에 취해 잠들어 전장에 참여하지 못했고, 이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패배하게 된다.]에서는 초공왕을 애꾸눈으로 만들어 버리는 등 대굴욕을 안겨주며 마지막으로 패권을 지켜내는 듯했으나... 경쟁자가 많은 권력 투쟁이 늘상 그렇듯이 유력 씨족들은 자신들 중에서 '''제일 센 놈을 조지고''' 보는 식으로 무력 항쟁을 거듭했고, 이 와중에서 공신 출신인 호씨(狐氏)[* 적족 혼혈인 호언, 호모의 자손. 호언의 아들 호야고와 호야고의 친척인 속국거가 조최의 아들 조돈과 권력 투쟁을 하다 살인을 저지른 속국거의 처형으로 나머지 일족들은 모두 적족으로 망명하였다.], 선씨(先氏)[* 성복 전투의 영웅 선진의 후손. 선진의 손자 선곡이 필 전투에서 독단적으로 행동함으로 패배의 원인이 되었고 뒤이어 적족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죽고 일족이 몰락한다.], 극씨(郤氏)[* 진나라 공족 극표의 후손. 진 여공 때 극주, 극기, 극지가 '삼극'이라 불리며 과도하게 권력을 휘두르다 그들에게 피해를 입은 적이 있는 관료들의 참소를 들은 진 여공에 의해 삼극이 살해당하고 나머지는 세력을 잃음. 이때 극씨 멸족을 주도한 서동은 또다른 공신의 후손이었다.], 난씨(欒氏)[* 곡옥환숙의 스승이자 진정후의 서손인 난빈의 후손. 난염이 포악하여 가문을 멸문 직전까지 보냈다. 그 아들 난영은 덕이 높아 많은 인기를 얻었으나, 귀족들 사이의 민심은 그들을 떠나서 제나라로 망명 후 반란을 일으켰으나, 난씨를 유일하게 도와주던 위씨가 범씨의 협박에 의하여 그들 반대편에 서서 결국 패하고 송나라로 망명한 난방을 제외하고 모두 처형. 제나라 난씨와는 별개의 가문이다.], 중항씨(中行氏)[* 순림보의 후손. 순임보가 중행장을 지내서 중항씨와 순씨를 병용했다. 마지막 가주인 중항인이 조간자와 전쟁에서 패해 제나라로 망명], 서씨(胥氏)[* 서신의 후손. 마지막 가주 서동은 아버지가 극씨 일가에 의하여 쫓겨나자 진 여공에게 아첨하는 간신이 되어 삼극을 모두 죽임으로써 극씨에게 복수하였으나, 난씨와 중항씨에 의하여 살해당하고 가문도 몰락하였다.], 범씨(范氏)[* 사회의 후손. 사회가 범 땅을 받아서 범씨와 사씨를 병용했다. 마지막 가주 범길사가 중항인과 같이 귀족들의 투쟁에 밀려 제나라로 망명] 등의 유력한 일족들이 몰살당하거나 추방당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특히 이 권력 투쟁 초기에 망한 씨족 중 많은 수, 예를 들면 호씨, 속씨, 극씨, 난씨 등은 진 공실과 혈연적으로 비교적 가까운 집안들이었다. 그러다보니 공실의 권위도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당연지사. 《좌전》에 보면 숙향이 진나라 공실에서 갈려나온 집안들이 대부분 다 끝장났다고 말한다. 양설씨(羊舌氏)[* 숙향은 자이고 본명은 양설힐이다.] 역시 진나라 공실에서 갈려나온 집안이고, 마지막에는 진나라 공실들이 다 망해가는데 양설씨만 살아남을 도리는 없고 결국은 양설씨마저도 망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됐다.''' 양설씨는 지씨의 모함으로 멸족됐다.[* 사실 이후의 한씨가 진나라 공실에서 갈라진 가문이긴 했지만 이들도 진나라의 권위 따위는 알 바가 아니었다. 심지어 족보상 한씨는 공실에서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위열왕 기준으로 보면 300년도 더 전에 갈라진 집안이니 더 말이 필요한가?] 춘추시대 말기의 협객인 예양이 지씨를 섬기기 전 범씨와 중항씨도 섬겼다는 것과 그들 역시도 지씨처럼 망했다는걸 보면 말기로 갈수록 권력투쟁이 심화된 듯 하다. 결국 춘추시대 말 즈음엔 지씨(智氏)[* 순림보의 동생 순수의 후손. 순수가 지 땅을 받아 지씨와 순씨를 병용했다.], 조씨(趙氏)[* 조최의 후손. 멸문의 위기에 몰렸다가 간신히 부활했다. [[조씨고아]] 참고.], 위씨(魏氏)[* 위주의 후손.], 한씨(韓氏)[* 곡옥장백의 동생 한만의 후손.]의 네 집안이 나라의 권세를 좌지우지하게 되었고, 그중에 No.2였던 조씨가 위씨와 한씨를 끌어들여 No.1인 지씨를 무너트리면서 이 기나긴 권력 투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여기서 [[예양]]의 이야기가 나왔다.] 이들 삼가(三家)는 진나라를 셋이 사이좋게 나눠갖기로 합의하고, 각자 나라를 세워 자립한다. 이 진나라의 삼분을 역사가들은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경계가 되는 사건으로 간주한다. 왜냐면 명목상으로나마 종주국인 주나라의 천자가 명분을 가지고 있는 진나라의 편을 들어주면서, 다른 제후국을 동원해 세 가문을 멸문시키고 진나라를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질서 유지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주나라의 천자가 그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기원전 403년에 세 가문을 제후로 인정하면서 이 사건은 주나라 왕실의 권위가 이미 땅으로 추락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 [[제나라]]에서도 강(姜)성 여씨를 내쫓아버리고 규성 전(田)씨가 제후가 되었는데, 이 역시 주 왕실에서 강씨를 복위시키는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으면서 주 왕실이 허울만 남았다는 것을 천하가 알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전국시대]]인 것이며, 삼가분진과 전씨대제는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가르는 기준이 되는 이유이다.[* 흥미롭게도 유유상종이라고 강씨를 쫓아내기 전 전씨는 삼진과 친하게 지냈다(...)] [[사마광]]이 《[[자치통감]]》에서 이 사건을 시작으로 중국사를 서술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진의 삼분 이후로도 사실 진나라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 영토가 익과 곡옥의 두 고도를 다스리는 게 고작인 성읍 국가로 돌아가 버렸다.(...) 후대 사람들이 없어진 거나 다름없다고 취급해버릴 정도로 몰락했다. 진나라의 공은 오랫동안 신하였던 [[주객전도|조, 위, 한나라의 군주들에게 '''문안 인사'''나 올리고]], 성 밖으로 [[섹스|계집질]]을 하러 다니다 자객에게 암살 당하는 등 끝없는 굴욕의 연속. 그렇게 100년을 더 버티다 나중에는 그 두 마을조차도 털리고 멸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