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서 (문단 편집) === 호평 === 《진서》가 수찬(修撰)되던 시기엔 진대의 문헌이나 1차 사료가 수없이 많이 있었고, 역대사 외에도 많은 량의 조령, 의주(儀注), 기거주(起居注), 문집 등이 있었다. 《진서》의 편찬자들은 대부분 남제의 학자 장영서(臧榮緖, 415~488)의 《진서晉書》[* 《[[수서]]》 <경적지>에 따르면 '《진서》 110권이 있는데 [[제(남조)|남제]](齊)의 서주 주부(徐州 主薄) 장영서가 사찬했다'고 했다.]를 바탕으로 여러 기록들을 참조하여 편찬되었다. 세간의 악평과 달리 현존 진서는 후대 남북조 사서들과 달리 주요 내용이 산일된 적도 없으며 진나라 역사 전체에 대한 기재가 완비되어 있다. 《[[구당서]]》의 〈방현령전〉에는 "《진서》는 장영서의 진서를 주로 삼아 여러 서적을 참고하여 자세히 쓰여져 있으나 편찬한 사관은 문학인이 많았기 때문에, 속이거나 틀리거나 자질구레한 일과 널리 이상한 말을 모으는 것을 좋아했고, 또한 곳곳에서 평론하며 화려함을 다투었으나, 사실을 살피는 것을 구하려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학자들에게 몹시 비웃음을 받았다."라고 기술했지만 반대로 말하면 악평에서도 인정했듯이 "여러 서적을 참고하여 자세히 쓰여진 사서"인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전대의 기록을 다룬 정사서인 《삼국지》가 지나치게 내용이 간략해 배송지가 주석으로 "자질구레한 일과 널리 이상한 말을 모으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점을 감안했을때 여기저기서 1차 사료를 많이 보존한 진서의 서술태도는 현대 역사학자들 입장에선 많은 도움이 된다. 당나라 이전의 각 진사는, 서진의 역사만 기록하거나, 양진의 역사를 병기하지만, [[오호십육국]] 역사에 대해서는 전문적으로 기술하지 않았다. 모두 완벽하지 않은 진사였던 셈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진서가 수찬(修撰)되던 시기엔 진대의 문헌이나 1차 사료가 수없이 많이 있었고 역대사 외에도 많은 량의 조령, 의주(儀注), 기거주(起居注), 문집 등이 있었는데 현존 진서는 이것에 대한 종합본이다. 때문에 청나라의 역사학자 조익은 "당나라 초에 《진서》를 편찬했는데, 장영서본(臧本)을 위주로 하였고 여러 학자들이 아울러서 조사하는게 이루어졌다. 현재 진서, [[송서]] 등 책의 열전은 여러 학자들이 기재한 것이며, 진서는 대략 수십가지 자료를 가지고 저술되었다." 하고 말했다. 또한 진서는 옛 사서의 부족분을 보충했다. 진서는 당 이전의 각 진사에 비해 내용이 비교적 상세하고 광범위하며, 기전에 수록된 대량의 조령(詔令), 주소(奏疏, [[상소]]), 서찰 및 문장이 장황하지만 다방면의 역사를 담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예컨데 진서 이전 시기를 서술한 [[정사 삼국지]]는 분명 명저이지만 기와 전만 있있고, 지(志)가 없었다. 진서의 지는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부터 묘사해 삼국시대의 생활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 조위가 일으킨 둔전과 관련하여 수리를 건설하여 농업을 발전시키고 북서쪽을 경영하는 모습 및 진나라가 일으킨 점전제에 대한 많은 저술이 있다. 진서의 '식화지'는 동한, 삼국 시대의 경제 발전을 설명하고 있으며 '여복지(輿服志)'와 '예지(禮志)', '악지(樂志)'는 위진남북조 지배계급이 의례의 복식을 숭상하는 풍조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였고, 이로써 [[후한서]]와 [[정사 삼국지]]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할 수 있다. 진서 지리지의 평은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다. 허나 진서 지리지가 문제가 있다고 해서 내용 자체가 다 오류가 있다는 건 아니다. 중화서국 표점본 《진서》를 교감한 학자들이 쓴 출판설명에 의하면 진서의 지리지가 가진 문제는 서진의 정황만 자세하고, [[영가의 난]] 이후의 동진 시대의 지명(地名), 관명(官名), 관직(官職), 시기(時期), 지점(地點)의 착오와 불일치가 많은 것이라고 한다.[* 방현령 등찬, 《진서(晉書)》, 중화서국 , 출판설명, 1~5] 때문에 청나라 [[건륭제]] 연간에 《동진강역지(東晉疆域志)》라는 책을 쓴 홍량길(洪亮吉)이 서문에서 말하기를, "역대 정사의 《지리지》에는 각자 득실이 있기는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착오가 많기로는 오직 《진서 지리지》뿐이다. 이 책은 태시(泰始), 태강(太康)만 자세하고, 영가(永嘉) 이후에는 몇 마디 말을 주워 모은 것이기 때문에 서진(西晉)의 지리지라고 할 수 있는 만큼 동진(東晉)의 강역에 대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동진의 지리지를 따로 편찬하는 이유를 들었다.[* 화림보, 《중국지명학원류(中國地名學源流)》, 호남인민출판사, 2002년, 354쪽 참조)] 즉 진서 지리지의 문제는 지리지 전체가 문제라기 보단 그 성격 자체가 '삼국통일 이후 통일제국 서진의 지리지'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로, 지가 아예 없는 전대의 사서 삼국지 자체의 보완까지는 크게 문제가 없다. 다만 동진 시기는 이후 다른 학자들이 편수한 동진의 지리지나 《[[송서]]》의 지리지를 살펴볼 필요성은 있다.[* 사실 이런면에서 보면 오히려 지나 표가 없었던 삼국지가 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삼국지의 본전이 예로부터 단점으로 지적받은 것이 기록이 너무 간소해서 빠뜨린게 많다는 것이다.] 당대의 1차 사료를 망라한 풍부한 기록을 자랑하는 만큼 진서는 재기(载記) 30권에서 서진 붕괴 이후 화북에서 난립하던 [[오호십육국]]의 역사도 정리하여 후대 역사연구에 큰 도움을 주었다. 오호십육국의 역사서로는 [[십육국춘추]]가 있지만 진서와 십육국춘추가 다루는 시기가 거의 겹치는 만큼 현대 역사학자들이 이 시기를 연구하면서 《진서》의 재기 역시 신뢰도를 가지고 인용하고 있다. 《진서》에는 재기 이외에도 열전 부분에 십육국 인물들에 관련된 기록들이 수록되어 있다. 진서는 동시기 화북 이민족 정권의 역사도 기록함으로서 이 혼란한 시대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였다. 종합하자면 《진서》는 사마씨의 진나라가 [[흥망성쇠]]를 거듭할 동안 중국의 수많은 사료를 보존한 사서로써 [[위진남북조시대]] 전기(前期)에 대한 상세한 사료로써의 가치가 매우 높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서는 진서에 대해 평가하길 당대를 다루고 있는 다양한 사료와 잔존하는 기록을 망라하여 고증해 모았다며 진서의 풍부한 사료 채집에 대해서 높게 평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