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성여왕 (문단 편집) === 자진 퇴위와 최후 === '''11년(서기 897년) 6월에 결국 지방 도적들의 반란이 자신이 부덕한 탓이라고 후삼국시대 개막의 책임을 지고 자진 퇴위했다.''' 태자 김요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북궁|북쪽 궁궐(北宮)]]로 거처를 옮긴 뒤 반 년 동안 [[태상황|태상왕]]으로 있다가 같은 해 12월에 승하했다. 당시 나이는 29세~32세 사이로 추정되는데, 상당히 젊은 나이에 죽었다. 신라 역사상 유례 없이 특이하게도 자진 [[퇴위]]한 데다 요절했다는 이러한 정황으로 봐서 자연스러운 양위가 아니라 [[쿠데타]]나 그에 준하는 원인 때문이고, 그 배후에 이후 즉위하는 [[신덕왕]], 그리고 신덕왕의 양아버지 [[박예겸]] 등 박씨 세력이 있다는 설도 있다. 박예겸은 [[헌강왕]](제49대) 재위 전반기까지는 [[시중]]으로서 국정에 참여했지만 헌강왕 후반기부터 [[경문왕]]계가 중앙 정계를 장악하면서 잠시 밀려났었다. 그러나 위와 같이 경문왕계의 통치가 후삼국시대라는 파국을 맞았고, 서라벌 사람들조차도 진성여왕과 김위홍을 은어로 비난하는 상황이 되었다. 꼭 쿠데타 같은 어떤 사건이 아니라도 자연스레 경문왕계 및 경문왕계와 밀접한 김효종 대신 대안으로서 박예겸의 박씨 세력이 부상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진성여왕 재위 후반기 어느 시점에 [[신덕왕|박경휘]]와 헌강왕의 딸이 혼인해, 김효종과 마찬가지로 왕의 사위로서 신라 법도상 왕위를 계승할 자격을 충족해 명분을 쌓기 시작했다. 이어 즉위한 효공왕 김요는 [[서자]]라는 혈통상 약점이 있는 데다 10대의 어린 나이로 실권이 없었고, 박예겸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늦어도 진성여왕 하반기에 이르면 박씨가 실권을 쥐었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진성여왕이 갑작스레 붕어한 것도 박씨가 배후가 아닐까 의심하기도 하지만, [[문의왕후|어머니]], [[경문왕|아버지]]와 [[헌강왕|두]] [[정강왕|오빠]], 뒤를 이은 [[효공왕|조카]]가 모두 단명하였음을 고려하면, 당시 [[의학]]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가족력이었을 가능성도 높은 편이다. 누대에 걸쳐 [[근친혼]]을 거듭해온 신라 왕실 특성상 [[유전병]]이 발병했었어도 이상할 게 없기 때문이다. 제38대 열조 [[원성왕]]부터 제48대 [[경문왕]]의 직계 조상들은 모두 근친혼을 6번 했다. 김충공-귀보부인(김인겸 또는 김헌정의 딸), 희강왕-문목부인(김충공의 딸), 김균정-[[정교부인]](김충공의 딸), 김균정-[[조명부인]](김충공의 딸), 김계명-광화부인(제45대 [[신무왕]]의 딸), 그리고 경문왕-[[영화부인]](제47대 헌안왕의 딸). 둘 사이의 소생이 [[경문왕]]의 직계 조상인 것만 넣은 거라서 애는 안 낳고 결혼만 한 것까지 추가하면 훨씬 늘어난다. 이러면 신라 후대에 암군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설명 가능하다. 《삼국사기》에는 황산(黃山)에 장사 지냈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에서 '황산'이란 지명은 대체로 지금의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지역을 가리키기 때문에, 진성여왕릉이 양산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만 멸망 이후에 묻힌 [[경순왕]]을 제외한 모든 신라왕릉이 [[경주시]] 지역에 있는데 진성여왕릉이 뜬금없이 양산에 있을 가능성이 낮다는 점과, 다른 몇몇 문헌들을 근거로 진성여왕릉이 양산에 있다는 것을 반박하는 의견도 있다. 황산이란 지명이 여러 곳이었을 수도 있다.] 《[[삼국유사]]》 <왕력>에는 "[[화장(장례)|화장]]하여 뼈를 연량(年梁)의 서훼(西卉) 또는 미황산(未黃山)에 뿌렸다"라고 되어 있다. * 참고 자료: 《[[http://mtcha.com.ne.kr/king/sinra/king51.htm|삼국사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