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안대군 (문단 편집) == 평가 == 정사인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를 비롯한 조선 초기 기록에선 고려의 충신으로 볼 여지가 전혀 없다. 그저 후계구도에서 배제된 후 과음하다 죽었을 따름이다. 진안대군파 족보에선 개국공신 [[이지란]]의 후손들이 인조 9년(1631)에 발간한 《청해백집》을 인용하여, 그가 위화도 회군 당시부터 아버지에 반대하고 고려를 향한 절개를 지켰고, 조선이 건국되자 철원 보개산으로 들어가 은거했다고 주장한다. 소주를 마시다 죽었음도 망국의 설움과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술로 매일을 지내다 병이 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에 실린 진안대군 묘비명 등을 살피면 [[양녕대군]]의 세자 양보설과 동일하게 조선 후기에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열었지만 아들, 그것도 다음 왕위가 약속된 장남이 왕위마저 거부한 채 고려에 충절을 다했다는 극적인 요소 때문에, 창작물에선 《청해백집》을 거론하며 그를 고려의 충신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절대 다수다. 문제는 청해백집이 언제 편찬된 서적인지도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청해백집을 이지란이 직접 남긴 기록으로 착각하지만 이지란의 후손들이 엮었다고 진안대군파의 족보에 인용문으로 전할 뿐이다. 당연히 내용도 진안대군파 족보에 기록된 것이 전부이다. 청해백집 원본을 서지학적으로 분석할 수가 없으니 실제로는 청해백집이 먼저인지 홍재전서가 먼저인지조차 불분명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