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안대군 (문단 편집) === 충신 긍정설 === 물론 고려 충신설이나 은거설은 후대의 역사나 야사에 언급된 것이고, 부정론에서 근거로 언급한 기록들은 정사에서 나온 것이니, 고려 충신설 자체는 신빙성이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부정론에서 주장하는 근거들을 다른 시각에서 보면 고려 충신설은 과하더라도 이방우가 스스로 세자 자리를 거부했을 가능성까지 배제하긴 어려운 점들이 일부 있다. 일단 창왕 대까지 이성계에게 동조하다가 공양왕 대에 이르러 가장 큰 정적이 된 정몽주 같은 사례도 있으며, 그 외에도 변안열을 비롯해 위화도 회군까지는 이성계의 편이었다가 그가 왕위를 찬탈하려 하자 반대하고 나선 인물이 많다. 세자가 되지 못했던 이유들로 지목되는 것도 다시 보면 설득력이 약하다고 볼 여지가 있다. 일단 지윤 등과의 혼인관계 때문에 세자가 되지 못했다고 한다면, 정종 역시 즉위하지 못했을 것이다. 본부인과 첩이라는 차이가 있는 것은 맞지만 정종 역시 지윤의 딸 두 명과 혼인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을 때와 정종이 세자로 책봉되었을 때의 상황이 다르다는 점, 그리고 정종은 이방원 일파가 무인정사의 명분으로 주장한 적장자로서 왕이 된 점을 감안해야 한다.] 위화도 회군의 경우도 요동 정벌이 시작되기 전부터 많은 반발이 있었던 만큼 이성계와 평소에 친분이 깊지 않은 인물들까지도 어쩔 수 없이 동조했었으며, 이방우가 이성계의 아들로서 도망치지 않고 우왕 진영에 남았다면 인질로 잡혀있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마당이었으니 회군에 참여했다는 것이 곧 그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는 근거까지는 되지 않는다. 사신으로 파견된 것 역시 세자가 되지 못했던 이유가 아니었을 수 있는데, 이색과 이성계 간의 갈등이 시작되고 있던 시점이었으므로 강제적으로 사신으로 선발되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비록 목적은 다르지만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이방원도 이색의 '요청' 에 따라 이색, 이숭인과 더불어 서장관으로서 파견되었으니, 이방우 역시 이러한 경우였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부정설의 주장에 의하면 창왕과 관련하여 이성계가 두 아들을 사신단의 일원으로 파견하였다는 점, 그리고 조선 건국 세력을 포함한 당시 대신들이 상왕이 된 우왕에게 한 우대 등에서 사료에 따라 판단한 조선 건국 세력과 우왕, 창왕 부자, 그리고 이색 일파 간의 관계나 초반 갈등을 회의적으로 보고 있지만,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간단히 풀릴 수도 있는 문제이다. 일단 우창비왕설이나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의 과장, 곡해 여부를 떠나서 우왕은 얼마 뒤 조정의 대신이었던 변안열의 아들인 변현과의 혼인을 앞둔 또 다른 대신이었던 [[왕흥]]의 딸과 동침하고 그녀를 [[선비 왕씨|선비]]로 봉했다는 일화도 있는 등 음행과 폭정을 일삼은 왕이었다는 점은 물론이고, 최영과 더불어 명나라에 맞서 요동정벌을 추진하려 했던 만큼 명에서도 그리 달갑지 않은 인물이었다는 점도 있었고, 위화도 회군 직후에는 자신의 명을 거역한 그들에게 악감정이 생겼다고 해도 다수의 환관들을 이끌고 대신들인 이성계, 조민수, 변안열의 저택에 침입하는 무모한 행동을 보여줬던 만큼 회군 세력에게 있어서 그의 폐위에 대한 명분이 있긴 했으나, 어쨌든 왕을 폐위한 만큼 그 왕의 아들을 어리다고 해도 후계자로 미는 것은 그 전의 국내외 역사들을 고려해봐도, 단순하게 생각해봐도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조선 건국 세력도 그렇지만 회군 세력 전체에게 있어서도 썩 좋은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조민수가 창왕을 옹립하기 전에 위치 상 위화도 회군과 관련이 없었던 이색과 손을 잡은 것도 그 점을 염두에 둔 것일 수도 있다.[* 고려사, 특히 원간섭기에 대한 이해부족이다. 여말선초에 이런식으로 아버지를 끌어내리고 아들을 세우는 게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원간섭기에 충렬-충선-충렬-충선-충숙-충혜-충숙-충혜를 이미 겪어 봤기 때문이다. 태종이 이거이를 탄핵할 때 그가 정종을 복위시키려 했다는 명분을 거론할 수 있었던 건 고려 멸망 후 조선 초기까지도 한번 양위한 왕이 다시 즉위하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는 인식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우왕이 다시 복위한다해도 이상하지 않게 생각하는게 이 시대의 사고방식이고 당연히 누가 봐도 무리수인 요동정벌의 책임을 물어 내려오게 한 걸로 정치적 부담이 생길 일도 없다. 중국의 슈퍼파워에 의해 왕이 수 차례 갈린 영향으로 중원 왕조의 인정이 그 어느 시대보다 중요한 권위로 작동했던 시절인데 당연히 요동정벌을 추진한 우왕은 여기서 실격이었다. 창왕을 명에 인정받게 만들려 부단히 애쓴 이색도 우왕 끌어내리는 것은 전혀 반대하지 않았다.][* 우왕이 신하들에 의해 왕위에서 끌려내려 왔으니 창왕과 아버지를 떠올리며 자신을 옹립한 신료들이 마찰을 빚는다는 건 고려사 이전에 전근대 권력의 기본 속성도 이해못한 주장이다. 공양왕은 자신을 옹립한 사람이 사돈인 이성계였기에 그가 왕위를 노리는 권신임에도 견제만 했을 뿐 그의 세력을 숙청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권력기반이기도 했으니까. 이색과 (마음 바뀌기 전의) 이성계는 함께 창왕을 옹립했고 이들과 손절을 시도한다는 건 창왕 스스로 자기 기반을 흔드는 정치적 자살행위를 한다는 뜻이다. 온건파와 무장들이 합심해서 창왕을 올렸는데 대체 누굴 믿고 자기 기반인 그들을 날린단 말인가? 소수 측근 세력으로 명맥을 이어가던 고려왕에게 그럴 힘이 없는건 둘째치고.][* 다만 충자 계열 왕들이 겪은 것은 음행과 폭정으로 폐위된 충혜왕을 제외하면 후궁문제라든지 고려왕과 심양왕 간의 권력투쟁이나 개혁 정책과 관련된 갈등 등과 같은 정치문제로 인해 '''당시 상국이자 처가였던 원나라의 간섭에 의해서, 혹은 자발적인 의지로 이뤄진 퇴위'''에 가까웠던 반면, 우왕과 창왕 부자같은 경우에는 차후 우왕을 상왕으로 대우해주긴 했으나 '''아랫사람인 대신들에 의해 벌어진 폐위와 즉위'''였다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는 있다고 본다. 또한 창왕이 왕권 유지를 위해 두 당파 간 연합을 유지하는 상태로 아우르고 가는 것도 사실 불가능했는데, 조선 건국 세력 중에서는 남은이나 조인옥 둥과 같은 경우처럼 이미 위화도 회군 직후부터 이성계의 속내가 어떻든 그를 왕위에 올릴 생각을 하는 인물들이 있었기에 목표가 다른 두 당파는 서로 갈라질 수 없는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창왕이 왕위에 오른 만큼 어린 그에게서든, 아니면 차후 다른 이에게서든 깨끗하게 선위를 받고 새 왕조를 세우려면 조선 건국 세력은 국내외적으로 좋은 이미지를 쌓아 훗날을 위한 명분을 만들 필요가 있었으니 일단 창왕에 대한 충성심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줘야 했을 것이고, 장남인 방우와 문신 출신인 방원을 창왕에 대한 사신으로 보낸 것이나 상왕이란 명분으로 개경에서 쫓겨난 우왕을 여러 차례 찾아가 우대한 것은 그러한 움직임의 하나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건국 세력의 과장된 조작인지, 정말 우왕이 벌인 일인지는 모르나 그가 김저, 정득후와 접촉하여 그들에게 곽충보를 만나게 함으로써 또 다른 틈을 주었고, 그로 인해 우왕에 이어 창왕도 우창비왕설에 의해 폐위되고, 이어서 두 부자가 비극적으로 죽는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 만큼 공양왕 이후의 기록이 전무하다는 것 또한 창왕의 조현을 청하기 위해 간 사신이라서 정치적으로 배제되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상술했듯이 정몽주라는 예도 있는 만큼 그 역시도 공양왕 대에 이르러서야 아버지와 그를 따르는 이들의 본심을 알게 되어서 관직을 내려놓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가령 최영은 이성계 집안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던 인물이고 정몽주는 이성계와 절친한 사이였는데, 이는 이들이 진안대군과도 어느 정도 친밀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자신의 아버지가 평소에 친분이 두터웠으며 자신과도 잘 아는 사이였던 어르신들을 모두 제거해 가면서까지 역성혁명을 시도한다는 것은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은거할 만한 이유가 될 수 있다. 조선 건국 이후에 사대 선조를 제향한 것이나 신주를 안치한 경우도, 당시 세자였던 이방석의 나이가 어렸기에 장자로서 그 임무를 맡았을 수도 있다. 게다가 이는 조상을 모시는 일이니, 개인적으로 조선 건국을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거부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부정설에서도 언급되기도 했던, 사망 직전까지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점이 문제로 남는데, 이 부분같은 경우에도 당시 조선군의 최상위 요직을 맡아 병권을 가진 이들이 당시 어렸던 이방번 정도를 제외하고 모두 조선 건국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큰 공을 세웠던, 이방과를 비롯한 왕족들이나 정도전, 남은, 이제 등의 공신들이었던 만큼 설령 그가 정말 충신설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조선에 부정적이어서 다른 마음을 가졌다고 해도 그가 가진 사병만으로는 그들, 더 나아가서 고려 말의 명장이었던 아버지 이성계를 상대로 무언가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만큼 감시나 호위 목적으로 조선 왕실과 조정에서 이방우의 사병을 유지시켜줬다고 볼 수도 있는 만큼 이 점도 문제가 되긴 좀 애매해 보인다. 특히 정말로 이방우의 마음에 문제가 없었다면 이방우 사후 그의 아들인 이복근이 계승했어야 될 사병을 이원계의 아들이자 이방우의 사촌인 이조가 물려 받은 상황은 긍정론의 관점에서 봐도 마치 이방우가 사라졌으니 군대를 물린 것처럼 보이는 묘한 부분이다. 물론 장성한 형들이나 조카들을 두고 가장 어린 막내가 세자로 책봉되었다는, 차후 생길 수 있는 이방석의 정통성 문제를 고려해서 이방우 가문의 영향력을 줄여야 되었기에 그랬을 수도 있긴 하다. 한편 비슷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 [[두문동 72현 전설]]이나 [[양녕대군]] 왕위 양보설이 한낱 야사로만 치부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당대의 기록에는 그런 내용이 안 나오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인데, 진안대군이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는 이야기는 바로 당대에. 그것도 이성계를 최측근에서 보필했던 의동생 이지란이 쓴 《청해백집》에 나온다.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이성계의 집안 일을 깊이 알고 있었을 사람이 남긴 기록이므로, 공식 기록에는 차마 실을 수 없었던 내용을 남겼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사실 진안대군은 스스로 세자가 되고자 했다면 뭘 해볼 수 있는 위치였다. 오랜 세월동안 집안의 장손 역할을 했다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적장자 계승론은 그 자체로 강력한 명분이었으며, 특히나 조선과 같은 유교 국가에서는 더욱 힘을 받을 수 있었다. 아무리 조선초기라고 하더라도 아들들의 서열대로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다. 이것이 일반적인 사고가 아니라면 [[이방원]]이 굳이 [[정종(조선)|정종]]이라는 완충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즉위했을 것이다. 5번째 아들로써 위에 명실상부한 형들을 모두 제끼고 즉위한다는 것은 그만큼 이방원 같은 철혈의 군주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며, 진안대군은 혼맥과는 관계없이 누구보다도 강력한 정통성과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왕자의 난의 주동자가 이방원이 아닌 이방우였다면 태조로써도 한 수 접어줄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최소한 명확한 사실은 '''이방우가 후계구도에서 배제된 것은 순수하게 외부의 영향으로만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상당부분 아니면 최소한이라도 진안대군 본인의 의지가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고려에 대한 충정은 아닐지라도 어떤 이유에서도 이방우가 쉽게 물러나준 것은 가장 강력한 카리스마와 욕망을 가진 [[태종(조선)|태종]]에게도 다행인 일이었을 것이다. 폐세자가 될 만큼 심각한 문제도 없고 과실도 저지르지 않은 장손을 막후 공작으로 폐한다는 것은 일단 국시에 어긋날 뿐더러 왕실 종친들에게서도 공감을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로 진안대군 다음 가는 둘째이자 부왕을 보필한 공로가 매우 큰 [[영안대군]] 이방과가 특별한 사유도 없이 이복동생들에게 밀려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자 그 동복동생들이 형을 국왕으로 추대한 사건이 바로 [[1차 왕자의 난]]이다. 즉, 당시 진안대군은 심각한 결함이나 과실이 없는 적장자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원한다면 세자가 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대중들의 인식과는 다르게, 정도전은 이방원보다도 이방과를 더 견제했다. 그런데 이방우는 하고자 했다면 이방과 이상으로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기록을 보면 저 둘과는 달리 뭘 제대로 하고자 한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자가 되지 않았고 친동생들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은 본인 스스로가 강력하게 거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그러한 사실에 대한 공감대로 왕족의 전반에 걸쳐 퍼져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요컨대 고려에 충절을 바쳤다는 것은 과장이라고 하더라도, 아버지가 왕위를 찬탈한 것에 대한 거부감이나 정치에 대한 환멸로 인해 혹은 개개인의 밝히기 어려운 사정들로 인하여 스스로 정치적 활동을 거부했을 가능성까지 아주 배제할 수는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