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양옥 (문단 편집) == 생애 == [[묘족]] 출신으로 명의 [[만력제]] 즉위 원년인 1574년에 3남 1녀 중에 셋째로 출생하였다. [[고명딸|유일한 딸]]이었기 때문에 사랑을 받고 자랐다고 하며, 당시 [[봉건제도|봉건사회]]에서는 드물게 여성의 몸임에도 학문과 무예를 닦았는데 그 성취가 남달랐다고 한다. 20세에 [[스주 투자족 자치현|석주]] 토사 겸 선무사 마천승[* 토사라는 관직은 [[토가족]] 등 [[소수민족]]들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명나라]]의 지방관직 중 하나이다. 실제로 마천승의 선조인 1대 석주토사인 마정호는 스스로 [[마원]]의 후손이라고 자칭했지만 실제로는 토가족이었다고 하며, 마천승은 26대 석주토사이다. 같은 토사직 중에는 파주토사가 있는데, 이 파주토사가 바로 양응룡의 난을 일으키는 양응룡이다.]과 혼인하여 1596년 아들 마상린(馬祥麟)을 낳았다. 1599년에 도적을 토벌하기 위해 물푸레나무로 만든 창인 백간창을 쓰는 부대인 백간병(白杆兵)을 남편과 함께 이끌었다. 백간병은 [[명말청초]] 전란기에 [[창(무기)|창]]으로 무장해 유명했던 정예병으로, 남편인 마천승은 3,000명, 자신은 500명을 이끌었다고 한다. 후에 남편이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혀 풀려났다가 홧병으로 사망하자 그의 관직과 함께 그 군사를 이어받아 크게 활약하였다. 사신의 목을 벨 정도로 강단이 있었다고 하며, 도적 600명과 그 수괴인 동산호의 목을 기습하여 이들을 참하기도 했다. [[숭정제]]는 그녀의 활약에 감탄해 술, 비단, 네 수의 시를 하사했다고 한다. 전근대 사람치고는 상당히 장수한 케이스인데, 70세의 나이가 될 때까지 장수로서 활약하여 사병 3천을 이끌고 반란군의 공격으로부터 [[사천성]]을 지키는 등 연전연승을 거두었으며, 성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이들을 토벌하였다. 그러나 늙어서 병약해졌기 때문에 낙향하였다. 그러다 1644년 [[이자성]]이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북경을 방어하였지,만 명나라가 멸망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이후 [[남명]] 정권에 망명해 [[후작|충정후]] 작위를 받은 뒤, 칠순의 노구를 이끌고 반란군과 싸움을 계속하다 1648년에 사망했다. [[명나라]]가 쇠퇴하던 시기에 관직 생활을 하면서 국운이 기울었음에도 끝까지 명조에 충성을 다했다는 점에서, [[청나라]]에 투항한 다수의 [[한족]] 장수들과 대비되어 칭송받는다. 특히 [[소수민족]] + [[여성]]이라는 비주류 출신의 대명사였음에도 주류인 한족 + [[남성]] 장군들을 뛰어넘는 전공과 충심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당대의 영웅이라 칭할만 하다. 동시에 명나라 사회가 능력이 출중하면 출신에 상관없이 출세할 수 있는, 전근대치고는 개방적인 사회였다는 점을 드러내는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현대 [[중국]]에서는 [[묘족]]들의 대표적인 위인으로 추앙받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