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평 (문단 편집) === 한 제국 === [[한나라]] 개국 후 초왕 [[한신]]을 사로잡는 지혜를 낸 공으로 호유후(戶牖侯)에 임명된다.[* 이때 자신을 천거해준 위무지에게 보답하는 것도 잊지 않는 의리를 보였다.] 그 후로도 양왕 [[팽월]], 회남왕 [[영포]]를 숙청하는 데 꾀를 써 큰 공헌을 한다. 그 덕에 더 풍족한 곡역 지방의 5천호를[* 사실 땅 크기만 따지면 3만호 이상이었는데 전란 때문에 사람들이 거의 다 도망가서 5천호만 남았던 것. 워낙 크게 줘서 그런지 유방은 먼저 줬던 호유후는 도로 가져갔다.(...)] [[식읍]]으로 받게 된다. 더더욱이 유방의 신임은 극에 달해 진평이 유방을 위해 계략을 6차례 내놓을 때마다 진평의 봉읍 수는 6차례나 증가했다. 조금 과장한 것이겠지만 여후 대에 이르러서는 식읍이 3만호에 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장량은 유방이 관중에 입성한 후 몸이 좋지 않아 집에서 건강관리에 주력했기 때문에 그 빈자리를 메꿔 유방의 제일가는 모사로 활약한다. 그리고 유방이 [[흉노]] 원정 중 [[묵특]]에게 오히려 [[역관광]]당하자 역시 그 특유의 기지로 묵특에게 한나라 미녀를 보낸다는 소문을 퍼트려 흉노 왕후의 질투심을 부추긴 뒤 유방을 구출해 낸다. [[연나라]]왕 [[노관]]이 모반하여 [[번쾌]]가 반란을 진압하러 나갔을 때, 고조의 황후인 [[여후]]와 인척관계에 있던 자[* 여후의 제부였다고 한다. 번쾌 또한 여후의 제부이니 번쾌의 아랫동서 쯤 될듯.]가 번쾌를 죽이려 모함한 사건이 있었다. 유방은 진평과 [[주발]]에게 번쾌를 잡아죽일 것을 명했다. 이 때 진평과 주발은 번쾌가 공도 크고 폐하랑은 동서이기도 한데 아무래도 홧김에 한 말 같다면서, 시키는 대로 우리가 직접 죽였다간 나중에 큰일 날지도 모른다고 상의하여 번쾌를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 [[시안(도시)|장안]]으로 연행한 후 집행은 유방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그리고 진평이 관중으로 돌아가자 유방은 죽어있었고, 국정을 좌우하게 된 여후는 자초지종을 듣고는 고생이 많았다며 진평을 칭찬하고 돌려보냈다. 만약 진평이 번쾌를 죽였다면 여후는 진평을 살려뒀을까? 진평의 융통성과 대세를 보는 안목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번쾌에겐 그야말로 생명의 은인인 셈이지만 번쾌의 부인인 여수는 오히려 진평이 꾀를 냈기 때문에 번쾌가 붙잡혀서 수모를 당했다면서 원한을 품었다. 퇴궐하게되면 그 틈을 타 여수가 국정을 장악한 여후에게 자신을 모함할까봐 겁을 먹은 진평은 일부러 궁중에서 생활하는 숙위직을 요청해 낭중령에 임명된다.[* 6년쯤 뒤에 조참이 죽고 진평이 좌승상이 될때까지 여수는 끈질기게 진평의 험담을 해댔고, 이럴 때마다 진평은 오히려 보란듯이 더 한심하고 방탕한 모습을 보여서 여후에게 자신의 무해함을 어필하려고 했다. 한참이나 이런 꼴을 재밌게 구경하던 여후는 그제서야 이제 경에 대해서는 여수의 말을 듣지 않을테니 안심하라고 위로했다. 물론 진평에겐 아무런 감동도 없었겠지만.(...)] 그리고 상국 [[소하]]와 [[조참]]이 죽자 유방의 [[유언]]으로 [[왕릉(전한)|왕릉]]은 우[[승상]], 자신은 좌승상이 되어 국정을 운영하게 된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여후를 위시한 여씨들의 전횡에 그는 숨을 죽이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진평도 이 사태에 책임이 있는게 혜제가 죽은 후 여후가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불안해 하는 것을 달래는 방편으로 여씨일족을 군부로 들이는 걸 진행했는데 이게 여씨의 전횡의 시작이라고 사마천은 기록했다. 여후의 대숙청을 두려워 했다는데 이때는 여후가 개인적으로 군대를 소유하지도 못했을 때이고, 군대를 가지고 있었던 말년에도 [[유장]]이 여씨를 살해해도 아무런 말도 못했다는 등의 일화를 보면 애초에 이들이 여후를 그렇게까지 두려워한 근거도 잘 알 수가 없어진다. 더군다나 여후가 공신들에게 가혹했다는 것 치곤 여후 대에 피를 본 공신은 정작 흔치 않기 때문에[* 여후에게 비협조적이었던 주창과 왕릉조차 제후로서 편안히 여생을 보냈다. 공신가문이 무더기로 몰락하기 시작한 건 여씨들이 모두 숙청된 후인 문제 때부터다.] 공신들은 오히려 여후에게 우호적인 지지층이었던 것이 아니었냐는 의견도 있다. 왕릉에겐 유씨 사직을 지키겠다고 말했으나 육가 열전에서 나오는 바로는 진평은 '자기한테 불똥이 튈까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주발과 공모할 생각도 육가가 주선한 뒤에야 떠올린 일일 뿐이다. 당초에 유씨를 위해 뭘 할 생각이 있긴 했을지도 미심쩍긴 하다. 그 일례로, 강직한 성격인 왕릉이 "지하의 선제를 뵙기 부끄럽지도 않은가? 왜 그대는 여씨를 내치지 않는가?"라고 격분해 따지자, 이 때 진평은 웃으며 "지금 조정에서 직접 간언하는 것은 내가 당신만 못하오. 그러나 사직을 보전하고 유씨의 후손을 안정시키는 일은 당신도 나만 못하오"라고 그를 달랬다.[* 이 말을 들은 왕릉은 [[아 씨바, 할 말을 잊었습니다|더 이상 할 말을 잊었다.]](드립이 아니라 사기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하지만 이런 말도 무색하게 정작 여후가 정권을 장악한 후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자기 몸에 화가 미칠까봐 전전긍긍하는 나날이라 울분이 쌓여서 집에만 들어가면 술에 빠져 상념에 젖곤 했는데, 어느날 찾아온 [[육가]]가 그 상태를 보고 진평에게 부족한 건 장수의 힘이라는 충고를 해주어 이런저런 문제로 사이가 매우 나빴던 주발과 극적인 화해를 맺고 기회가 오기만을 노렸다.[* 이 일의 보답으로 육가에게 생활비로 쓰라고 500만전이나 보내줬다.] 그리고 얼마 후 여태후가 사망하자 태위 [[주발]]과 공모해 재빨리 그들을 뿌리째 뽑는 비범함을 보였다. 그리고 유방의 넷째 아들인 유항을 [[한문제|문제]](文帝)로 옹립한다. 여씨들이 참수당하는 와중에 유독 여수는 맞아 죽었다거나, 죽을때까지 채찍질을 당했다는 등 언급이 잔인한데 아마 위에서 얘기했던 진평과 여수 사이의 원한 때문인 듯하다. 주발과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음에도[* 위에 언급한 뇌물수수 사건 때 가장 크게 목소리를 높인 인물이 주발이었다. 거병부터 유방을 따른 장수 중 하나인 주발 입장에선 굴러들어온 놈이 낙하산으로 감찰직을 맡게 됐으니. 진승상세가에 의하면 이 때 진평을 제일 비난한 사람은 주발과 [[관영]]이었다고 한다. 또한 젊을 적부터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 진평은 수없이 여색을 탐하며 형수랑도 [[검열삭제]]를 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이런 색마를 받아들이는 것은 인의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그의 등용을 반대하기도 했었다.] 같은 공신인 [[육가]]의 중재와 황실에 대한 충성심으로 의기투합해 여씨천하를 척결한다. 문제는 주발의 공이 더 크다고 생각했는데, 진평이 ~~삐졌는지~~ 주발을 우승상으로 추천하고 관직을 내려놓으려 하자 문제가 이유를 물었고, 진평은 "제가 지난 전쟁 때는 주발보다 공이 높았지만, 이번에는 주발이 저보다 나았으니 양보하려 합니다."라고 대답하여 진평의 공을 여씨 척결 때만 보고 평가해선 안됨을 안 문제는 직책은 좌승상으로 두는 대신 식읍을 더해주었다. 여담이지만 진평 사후 주발이 다시금 우승상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주발이 물러난 것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그런데 주발세가에서는 또 주발이 문제에게 견제당할까봐 스스로 물러났다고 말한다.] 문제가 승상 직위에 있는 주발과 진평에게 각각 나랏일을 물어보았다. 올해의 재판은 몇 건이나 있는가, 나라의 재정 상태는 어떤가 등의 질문에 대해 주발은 당황하며 대답하지 못한 반면, 진평은 담당하는 관리가 따로 있으니 불러서 물어보면 될 거라고 답했다. 그러자 문제가 물어보았다. "업무를 담당하는 관리들이 따로 있다면 승상인 그대는 무슨 일을 하는가?" 여기에 진평은 명쾌하게 대답했다. "위로는 황제를 보필하고 아래로는 모든 만물이 조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밖으로는 오랑캐와 제후를, 안으로는 만민을 다스리며, 뭇 관리들에게 맡은 바 직책을 완수시키는 것이 승상의 할 일입니다." 문제는 진평에게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궁전에서 나와 주발이 분한 마음에 진평에게 따지고 들었다. "왜 그런 명쾌한 답변을 알면서도 미리 말해주지 않았소!" 진평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공께서는 아직도 승상의 임무를 모르셨단 말이오? 가령 폐하께서 장안의 도난 건수를 물어보신다 한들 승상이 그걸 직접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하오?"라고 되물었고 주발은 부끄러워하였고, 자신의 능력이 진평에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는 병을 핑계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처음부터 유방을 따른 수하가 아닌, 중간에 편입된 수하이지만 유방에 입맛에 맞는 계책을 펼쳐 여러 공로로 유방의 총애를 받았다. 항상 대세를 잘 살피고 [[한신]]이나 여씨일족 척결의 예를 보듯이 상대의 뒤통수를 치는 능력이 뛰어나다.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처럼 은거한 장량보다 끝까지 남아서 더 많은 활약을 한 진평의 처세술을 더 높게 쳐주는 시각도 있다. 진평은 모략으로 점철된 자신의 인생에 대해 "나는 모략을 많이 꾸몄는데 이것은 도가에서 꺼리는 바다. 만약 내 후손이 제후 자리에서 쫓겨난다면 그대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이는 내가 음모를 많이 꾸민 화근 때문이리라"라며 말한 바 있다. 그후 진평의 작위는 아들, 손자 때까지 이어지다가 증손자 진하가 남의 아내를 강탈한 죄로 목이 잘리면서 후국은 폐지되었다. 또 다른 증손인 진장이 [[한무제|무제]]의 황후 위씨의 형부가 되는 인연으로 가문이 부귀를 누리긴 했지만 끝내 [[후작]]의 작위는 찾을 수 없었다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