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포해전 (문단 편집) == 어떻게 해적들이 500여척의 함대를 꾸렸나? == [[파일:external/oi64.tinypic.com/dwfaqa.jpg|width=400]] 당시의 왜선 500여척은 왜구의 역사를 통틀어도 가장 압도적인 규모에 속한다.[* [[노량해전]] 당시 집결한 규모가 300척이었다. 다만 왜선의 규모의 차이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떤 식으로 대함대가 등장했는지 확실히 알긴 어렵지만, [[규슈]]의 [[남조]] 세력이 다카기·아마쿠사 일대의 선박을 대피시키기 위해, 그리고 남조의 본거지 기쿠치 일대가 포위당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병량미를 얻기 위해서 생겨났다는 의견이 있다. 이런 견해를 따르자면 이 1380년의 왜구는 다카기·아마쿠사 지역의 수군 세력은 물론, 규슈 최남단의 오오스미 지역의 호족 네지메씨 주변의 남조 세력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당시의 일본 남조는 북조의 규슈 공격이 시작되어 무너져 내리는 상황이었으므로 '''활로'''를 뚫기 위한 [[최후의 발악]]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려 말 왜구와 남조 : 경신년(1380년)의 왜구를 중심으로 中, 이영] 물론 왜구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워낙 견해가 상이해서 확실한 결론은 없다. 일본에서는 고려 말의 왜구가 내륙의 행정 시스템까지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으로 볼 때, 일본인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닌 고려인의 지방 세력이 다수 포함되었다는 정 반대의 주장도 있다. 또한, 남조의 운명이 멸망 직전에 몰린 상황에서 대함대를 보낸다는 것은 정신이 나간 행동이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이렇듯 당시의 왜구들은 이질적인 형태를 띄었다. 이들은 전략 전술을 비롯한 행동 양식이 교육을 받은 군대에 가까웠으며, 일부에서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기병을 운용할 때는 유목 민족이랑 비슷한 기록도 많이 발견된다. 이런 설을 따른다면, 원명 교체기에 갈 곳을 잃은 해양 세력 + 남조편에 섰다가 궁지에 몰린 왜구들이 [[아르덴 대공세|최후의 명운을 걸고 고려로 진출했다]]는 가설도 존재한다.[* 같은시기 홍건적, 원의 잔존 세력, 이전에는 금나라의 여진족과 요나라의 거란족도 고려를 정벌하여 재 부흥을 노리겠다는 목적으로 수만 단위의 침략군을 파견한 전례가 있었다. 참고로 전자는 동시대였다. 그러니까 고려는 '''남북으로''' 목숨을 걸고 침략을 감행하는 수만 단위의 군대를 연달아 상대해야하는 북로남왜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아무짓도 안 했는데 양면전선 개전--] --이상향을 찾아 떠나는 낙오자들.-- 분명한 것은, 진포에 나타난 500여척의 함대가 상당한 규모였다는 점이다. 이 엄청난 군단은 [[적벽대전|큰 밧줄로 서로 잡아매고 있다가]] 여러 주(州)ㆍ군(郡)으로 갑자기 흩어져 마음대로 불태우고 노략질을 하니 '''고려 백성들의 시체들이 산과 들에 뒤덮이는(屍蔽山野)'''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그렇게 노략질한 곡식을 질질 끄며 운반을 하느라 땅에 널부러진 쌀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