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혜기 (문단 편집) == 생애 == 진패선의 종손으로 경서와 사서를 섭렵했으며, 자신의 재능을 자부했고 충동적으로 행동하였다. 진혜기는 진패선이 [[후경]]을 토벌할 때 종군하여 병마를 받았으며, 진패선이 두감을 정벌할 때도 종군하여 정위장군(貞威將軍), 통직산기상시(通直散騎常侍)로 제수되었다. 557년, 진패선이 [[양(남조)|양나라]]의 마지막 황제 [[경제(양)|경제 소방지]]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르니 이가 초대 황제인 [[무제(남진)|무제였다.]] 진혜기는 의황현후(宜黃縣侯)에 봉해졌고 식읍 500호를 받았으며, 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 제수되었다. 559년, 무제가 붕어하고 진천이 즉위하니 이가 제2대 황제인 [[문제(남진)|문제]]였다. 진혜기는 안길현령(安吉縣令)으로 전출되고 군부(軍副)로 옮겼다. 사공(司空) 장소달이 안촉성(安蜀城)을 정벌할 때 진혜기는 수군도독(水軍都督)이 되어 형주(荊州)에서 청니(青泥)의 배들을 불태웠다. 567년, 지절(持節), 통직산기상시, 선원장군(宣遠將軍), 풍주자사(豐州刺史)로 제수되고 식읍이 1,000호로 늘어났다. 578년, [[오명철]]의 북벌이 실패하자, 진혜기는 지절(持節), 지무장군(智武將軍), 연강도독(緣江都督), 연주자사(兗州刺史)로 임명되고 식읍이 2,000호로 늘어났으며, 나머지는 예전과 같이 내렸다. [[북주]]가 승리를 틈타 회남(淮南)을 점령하자, 진혜기는 사졸들을 수습하고 해도를 따라 수도로 돌아왔다. 이윽고 사지절(使持節), 산기상시, 선의장군(宣毅將軍), 도독영파2주제군사(都督郢巴二州諸軍事), 영주자사로 제수되고 식읍이 2,500호로 늘어났다. 584년, 사지절(使持節), 산기상시, 운휘장군(雲麾將軍), 도독형신2주제군사(都督荊信二州諸軍事), 형주자사가 되었고 기녀 1명을 받았으며, 식읍이 3,000호로 늘어났다. 587년, [[후량(남북조시대)|후량]]의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안평왕(安平王) 소암(蕭巖)과 진희왕(晉熙王) 소헌(蕭瓛) 등이 2만 명을 이끌고 진혜기에게 항복을 청하자, 진혜기는 군대를 이끌고 이들을 맞이하였다. 또한 이때 시중(侍中),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정서장군(征西將軍)이 더해졌고 식읍이 6,000호로 늘어났으며, 나머지는 예전과 같이 받았다. 588년, [[수나라]]에서 진왕(晉王) [[양제(수)|양광]]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남진 정벌군이 출병했다. 원수 청하공(淸河公) [[양소(수나라)|양소]]의 군대가 파협(巴硤)을 거치자, 진혜기는 자신의 장수 여충숙(呂忠肅)과 육륜(陸倫) 등을 파견하여 양소의 진군을 막으려고 했으나 전패했고 양소는 그대로 마두(馬頭)를 점령했다. 한편 수나라 장수 한금호와 하약필 등이 이미 장강을 건너 장산(蔣山)을 점령하자, 소식을 접한 진혜기는 자신의 장사 진문성(陳文盛) 등을 남기고 자신은 직접 3만 명의 장사와 1천여 척의 누선을 인솔하여 장강을 건넌 뒤 수도 건강을 구원하려고 했다. 그러나 진혜기의 진군은 한구(漢口)에서 진왕(秦王) 양광에게 가로막혀 실패했고, 결국 진혜기는 상주자사(湘州刺史) 진희왕(晉熙王) 진숙문(陳叔文), 파주자사(巴州刺史) 필보(畢寶) 등과 함께 양광에게 항복을 청하였다. 진나라가 멸망한 뒤 진혜기는 장안으로 압송되어 의동삼사로 제수되었고 머지않아 사망하였다. 아들인 진정평(陳正平)은 문학으로 알려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