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흥왕 (문단 편집) == 여담 == * [[일본]]사에서는 [[무로마치 막부]]의 제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진흥왕과 비슷한 행보를 보인다.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남북조 시대를 [[통일]]하고, 막부의 권위를 높여 무로마치 막부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불심이 깊어 말년에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는 점[* 물론 [[권력]]은 계속 장악하고 있었다.]에서 진흥왕과 유사점을 보인다. * 휘는 삼맥종(彡麥宗) 또는 심맥부(深麥夫).[* 삼맥(彡麥)은 [[승려]]라는 뜻의 삼마(彡摩, *sama), 사미(沙彌, *sami), 소물(所勿, *sHmH) 등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동자승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스라마네라(Sramanera)가 나온다.] [[지증왕]]의 손자이자 [[법흥왕]]의 조카 겸 외손자. 법흥왕의 동생 [[입종 갈문왕]]과 법흥왕의 딸 [[지소태후|지소부인]](只召夫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왕비는 [[사도부인]]. 자녀는 [[김동륜]], [[김사륜]]([[진지왕]]), [[김구륜]](金仇輪)[*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이제가기]]》에 따르면 [[아자개]]의 조상이다. 세대를 따져보면 증조부이지만 일단 수백년이라는 연대 차이상 증조부일 수는 없으며 김구륜의 아들이라고 나오는 [[파진찬]] 선품이 문무왕의 장인으로서 정사에 등장하기 때문에 선품~작진 사이의 계보가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등 총 3남이다.[* 필사본 《[[화랑세기]]》로 가면 정실인 사도부인을 포함한 7명의 부인에게서 6남 8녀를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화랑세기》는 위서일 가능성이 높다.] * 신라를 진흥시킨 왕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진흥시키다'의 진흥은 振興(떨칠 진, 일 흥)이고, '진흥왕'의 진흥은 眞興(참 진, 일 흥)이라는 거다. 쉽게 말하면 '''진짜로 일으킨 왕'''이라는 뜻. [[법흥왕]]과 더불어 [[불교]]식으로 시호를 올린 예로 손꼽힌다.[* 본래 시호는 사후에 올리는 것이지만 신라의 경우 살아 생전에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 재위기에 세워진 [[진흥왕 순수비]]에조차 대놓고 '진흥태왕'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니. 이는 [[시호]]나 [[연호]]같은 [[중국]]식 문화가 바로 전대의 왕인 법흥왕 때에 들어왔기 때문에 신라에서 시호라는 개념이 완벽히 정착되지 않았을 수 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시호가 아니라 [[존호]]에 가까웠다고 봐야할 수도 있다. 이처럼 생존에 받은 존호가 사후 시호가 되는 방식을 사용했거나 아니면 그냥 시호나 존호가 아니라 왕의 이름이라는 주장도 없지는 않다. 중국측 기록에 신라 왕의 [[성명]]이 김진흥, 김선덕([[선덕여왕]]) 식으로 등장하기 때문. 물론 신라 왕들은 즉위 전에 본래 이름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이름이라는 설이 사실이라면 왕위에 오른 뒤 새롭게 붙인 이름일 것이다.] * [[지증왕]]과 [[법흥왕]] 때 [[고구려]]와 [[백제]]가 싸우는 동안 후방에서 내정을 개혁하면서 국력을 비축해 중흥의 기틀을 단단히 마련했고, 이를 이어받은 진흥왕은 대대적인 정복 [[전쟁]]을 펼쳐 엄청난 성과를 이룩해냈다. 진흥왕은 지금의 [[경상북도]] 전역, [[경상남도]] 동부 지역, [[충청북도]] 동부 지역([[삼년산성]]이 위치한 [[보은군]]과 [[옥천군]] 일대), [[강원도]] 남부 지역(오늘날의 [[강릉시]]인 하슬라 이남 지역)을 지배하던 신라를 물려받아 북쪽으로는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과 [[영흥|영흥만]], 서쪽으로는 [[한강]] 유역과 [[황해]] 연안, 남동쪽으로는 [[가야]]를 완전 정복해 영토를 즉위 시점의 3배 이상으로 크게 신장시켰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처음 왕이 됐을 때 [[경상북도]]와 기타 지역 약간이었는데 정복 전쟁 뒤에는 신라의 영토가 [[함경남도]], [[경기도]], [[강원도]], [[충청북도]], [[경상북도]], [[경상남도]]가 되었다. 이는 현대 [[대한민국]]보다 넓으며 훗날 [[삼국통일전쟁]] 때와 비교해도 진흥왕 시대의 중북부 지방 [[정벌]]이 비율상으로는 훨씬 급격한 영토 확장이었다. 진흥왕 대에 점령한 영토는 춥고 생산력이 낮은 쓸모없는 땅도 아니라 한강과 [[낙동강]] 유역 등 [[한반도]]의 중요 지역들로 교과 과정에서는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시점부터 [[삼국시대]]의 주도권이 신라에게 넘어오는(4세기 [[백제]] → 5세기 [[고구려]] → 6세기 [[신라]]로 도식화해서 가르친다.) 신라의 실질적인 전성기로 파악하고 있다. * 진흥왕의 재위기에 갑자기 신라가 너무 커져버린 탓에 역설적으로 후대 [[진평왕]] 말기부터 [[선덕여왕]] 시기에는 지켜야 할 방어선이 길어지고, [[고구려]]와 [[백제]]가 합작으로 [[신라]]를 압박하여 [[양면전쟁]]을 강요받아 국방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실제로 진평왕대에 신라는 한강 유역 지방에 방어군을 밀집시켜놓은 탓에 고구려군에게 함경도를 다시 빼앗기고, 백제군에게는 대야성이 함락당하여 서라벌로 가는 길이 위협받는 등 많은 고초는 있었다. 그래도 이는 영토가 넓어진 것에 따른 대가라고 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는 진흥왕이 획득한 영토를 기반으로 신라가 최후의 승자가 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 정복을 많이 했는데 정복의 대부분이 진흥왕이 10대 후반~20대 혈기왕성한 청년기에 이뤄졌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처럼 '''[[역사]]의 대표적인 [[청년]] 정복군주이다'''. 흔히 진흥왕의 동시대 [[라이벌]]처럼 여겨지는 백제 [[성왕(백제)|성왕]]은 사실 진흥왕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아버지뻘 이상이었고, 성왕의 아들인 태자 [[위덕왕|부여창]]보다도 진흥왕이 10세나 어렸다. 젊을 때 엄청나게 활약했지만 [[수명]]은 짧은 편이었다는 점도 광개토대왕이나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비슷한 부분이다. 하지만 진흥왕은 둘보다는 오래 살았는데 그래봤자 진흥왕도 42세에 사망하여 사실은 [[도토리]] 키재기. 다만 일찍 죽었다는 이미지가 덜한 편인데, [[광개토대왕]]이나 [[알렉산드로스 3세]]에 비해 매우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꽤 오래 통치한 것처럼 인식된다. 비슷한 케이스로는 [[조선]]의 [[성종(조선)|성종]]이 있다.[* [[성종(조선)|성종]]은 38세에 죽었고, [[문종(조선)|문종]]보다도 빨리 죽었다. 다만 11세 때 왕위에 올라서 그런 이미지가 약하다.] * 초기의 [[연호]]는 '[[개국]]'(開國), 이후에 '태창'(太昌), '홍제'(鴻濟) 순으로 바꾸었다. 이중 '홍제'는 [[진지왕]]과 공유하며, '태창'은 [[동륜태자]]가 태자로 있던 기간과 거의 겹친다는 점을 고려하면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반영된 연호는 '''개국'''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