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흥왕 (문단 편집) === 외교 === 진흥왕 때 신라는 비로소 [[서해]]에 면한 [[항구도시]] 당항성(지금의 [[경기도]] [[화성시]])을 얻어, 백제나 고구려를 거치지 않고 직접 중국 국가들과 교역할 수 있게 되었다. 기록을 보면 신라가 건국 ~ 진흥왕 이전 수백년 동안에 중국 국가들에 사신을 보낸 건 377년, 382년, 502년, 508년, 521년 딱 5번 뿐이었다.[*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에 2번, [[북위]]에 2번, [[양(육조)|양]]에 1번] 그나마 이것도 고구려나 백제 사신이 갈 때 신라 사신을 데려간 게 대부분이었고, 같은 시기 고구려와 백제는 서해에 접해 있다는 지리적 장점 덕분에 중국 국가들에 수십번씩 사신을 보냈다. 그런데 진흥왕 이후 ~ [[진덕여왕]]까지 100년 정도 동안 신라는 중국에 42번 사신을 보냈다.[* [[북제]]에 2번, [[진(육조)|진]]에 8번, 수에 6번, 당에 26번] 진흥왕의 한강 하류 점령 이후 신라가 중국ㆍ서역 문물을 이전 시대보다 [[넘사벽]]으로 받아들이기 쉽게 되어 비로소 고구려와 백제의 조건과 동등해진 것이다. 당시 중국은 [[남북조시대]]로 여러 나라로 갈라져 있었는데, 진흥왕은 564년에는 [[북제]]에 사신을 보내고, 북제 역시 여기에 화답해 신라에 '동이교위' 관작을 수여했다. 동이교위는 중국 동쪽에 있는 [[동이]] 여러 나라들의 교섭을 총괄하는 의미로 물론 명목상의 관작이지만, 본래 '동이교위'나 '동이중랑장' 관작은 [[북위]] 시절부터 북조가 [[장수왕]]을 비롯한 고구려 역대 국왕에게 수여하던 관작이었다. 이는 북조를 차지한 북제가 나름대로 진흥왕의 신라를 전성기 고구려를 대신하는 새로운 세력으로서 인정한 것이다. 이후 남조 [[진(육조)|진]]과도 외교 관계를 맺으며, [[불경]] 1,700여 권을 선물로 받았다. 당항성은 이후에도 수, 당, 왜, 서역 등으로 사신을 보내고 무역을 하는 창구로 계속 쓰였다. 549년 2월에 양나라에서 사절단으로 갔던 사신들과 유학을 갔던 승려 각덕(覺德)을 보내면서 사리(舍利)[* [[석가모니]]의 유골이나 오랜 수행을 한 스님을 화장했을 때 나오는 구슬을 말하는데 당시 [[무제(양)|소연(蕭衍)]]은 병에 걸린 것으로 의심할 정도로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소연은 백제에 불경을 전파해 준 왕이기도 했는데 신라도 영향을 어느정도 받은 것으로 보인다.]를 보내왔는데 이에 진흥왕은 흥륜사(興輪寺) 전각에서 이들을 맞이하게 했다. 즉 진흥왕은 [[장수왕]], [[위덕왕]]처럼 남북조 국가들이랑 모두 조공ㆍ책봉 관계를 맺은 왕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