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질지왕 (문단 편집) == 행적 == 재위 2년째인 452년 [[수로왕]]과 [[허황옥]]을 기리기 위해 김수로와 허황옥이 처음 만난 자리에 절을 세우고 왕후사(王后寺)라고 지었으며 밭 10결을 바쳐 건설 비용에 사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로왕(首露王)의 8대손 김질왕(金銍王)은 정치에 부지런하고 또 참된 일을 매우 숭상하여 시조모(始祖母) [[허황옥|허황후]](許皇后)를 위해서 그의 명복(冥福)을 빌고자 했다. 이에 원가(元嘉) 29년 임진(壬辰)[* 452년.]에 수로왕과 허황후가 혼인하던 곳에 절을 세워 절 이름을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절 근처에 있는 평전(平田) 10결(結)을 측량해서 삼보(三寶)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쓰게 했다. > >이 절이 생긴 지 500년 후에 장유사(長遊寺)를 세웠는데, 이 절에 바친 밭이 도합 300결(結)이나 되었다. 이에 장유사의 삼강(三綱)이, 왕후사(王后寺)가 장유사의 밭 동남쪽 지역 안에 있다고 해서 왕후사를 폐해서 장사(莊舍)를 만들어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 겨울에 저장하는 장소와 말을 기르고 소를 치는 마구간으로 만들었으니 슬픈 일이다. >---- >ㅡ 《[[삼국유사]]》 [[가락국기]] 사실 [[인도]]에서 왔다는 허황옥은 후대에 어느 정도 [[신격화]] 작업이 가미된 것으로 보는 시각도 많은데 [[불교]]가 [[가야]]에 들어오고 이를 수용했던 시기가 바로 이 시기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전까지는 불교에 관한 기록이 없었는데 이때 [[절(불교)|절]]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처음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는 《[[삼국유사]]》 권3 제4 탑상 - 금관성의 파사석탑 편을 봐도 알 수 있다. >(중략) 수로왕이 공주를 맞아들여 함께 나라를 다스린 것은 150여년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해동에는 아직 절을 창건하고 불법을 받아들이는 일이 없었다. '''불교가 아직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지방 사람들이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기》[* [[가락국기]]를 말한다.]에도 절을 창건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다가 제 8대 질지왕 2년 임진에 이르러 그 땅에 절을 세웠고 왕후사를 창건해 지금까지 복을 빌고 있으며(후략) 나라를 안정화하기 위해 [[허황옥|허씨]] 일가와 손을 잡고 불교를 수용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마 취희왕 때 혼란기가 있었고 이겨내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한듯 보인다. [[왕후]]는 사간 김상의 딸인 김방원이며 자식은 [[겸지왕]] 하나만 알려져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