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집시 (문단 편집) === 유럽 === 현재 유럽의 많은 집시들은 빈곤층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남유럽]]과 [[동유럽]]의 집시들은 [[소매치기]] 등 경범죄와 관광객들에게 싸구려 물품 [[강매]]하기 등으로 먹고사는 경우가 많아 집시에 대한 반감을 강화하고 있다. 사실 일용직이나 노점상, 비정규직 노동자나 심하면 마피아 갱단, 매춘으로 먹고사는것은 타 동유럽인들도 똑같기는 하지만, 이들은 유고슬라브인을 제외하면 동구권 붕괴 이후에 온 경우가 절대다수이고, 냉전시절에는 동구권에서 왔다하면 불쌍한 난민 취급받았기라도 했는데, 집시들은 동구권 붕괴 이전 훨씬 전부터 정착한 이들이 많아서 집시들이 보다 직접적인 차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원래 자신들을 뜻하는 명칭과 같은 [[로마제국]]의 영토였던 곳에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다. 이것은 [[지중해성 기후]]가 원래 북인도에 살던 그들에게 그나마 괜찮은 기후였던 것도 있다. [[프랑스]]와 [[스페인]], [[포르투갈]] 같은 국가에서 집시는 아랍 [[무슬림]]과 [[흑인]]들이 대규모로 유입되어 [[유럽 난민 사태]]가 발생하면서 사회적 이슈에서 비켜난 것일 뿐, 집시는 여전히 사회적으로 마찰이 잦고 갈등이 심한 소수민족 중 하나이다. [[이탈리아]]에서는 2008년에 해수욕장에서 행상을 하던 두 집시 소녀가 바닷물에 빠져 죽었는데, [[경찰]]이 1시간 뒤에 관을 들고 와 치울 때까지도 휴양객들이 거의 개의치 않고 집시 소녀가 사망한 자리에서 일광욕을 하고 있던 사진이 공개되어 큰 충격을 주었다. [[https://www.google.com/amp/s/amp.observers.france24.com/en/20080723-holidaymakers-drowned-roma-girls-naples|#]] [[아돌프 히틀러]]도 당연히 집시들을 미워하여, 홀로코스트 과정에서 유대인, 슬라브인 못지않게 많은 집시인들을 학살하였다. 독일의 집시들도 사회에 정착하려고 독일제국군에 입대해서 열심히 싸운 경우가 많았지만 이는 무시되었다. 거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데 집시를 같이 끼워넣은 셈이었는데, 다행히(?) 생존률은 유대인보다는 높았다. [[홀로코스트]]와 같이, 집시인 집단학살을 의미하는 '포라이모스(Porajmos)'나 '사무다리펜(Samudaripen)'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유럽]] 각지에서 70~80% 가량에 해당되는 50만에서 100만 정도가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될 뿐, 자세한 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 정부가 유대인을 학살한 것에 대해 깊이 참회하고 사과하는 것에 비해서, 집시들을 학살한 것에 대해서는 사과도 안 하고 잘 짚고 넘어가지도 않았고, 집시의 학살은 1980년대가 되어서야 공론화되었다. [[나치 독일]]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의 [[극우]] 민족 단체인 [[우스타샤]] 또한 크로아티아 영내의 [[세르비아인]], [[유대인]]과 함께 자국 내 집시들도 학살했다. 웃픈 사실은 이 당시 타켓이 된 집시 가운데서는 잘사는 집시들이 많았다는것이다. 이는 독일의 집시 가운데서도 출세를 위해 군입대를 해서 공적을 세운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치가 집권하기 이전에는 높은 소득, 높은 교육수준을 지닌 집시 중산층들이 어느정도나마 형성되어있는데, 나치 독일이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부랑자뿐만 아니라 이들도 같이 학살을 해댄것이다. 2006년에 동유럽 국가들이 대거 [[유럽연합]]에 가입하면서 집시 대상으로 교육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하면서 동유럽 내에 있는 집시들에 대한 대우가 좀 나아지나 싶었지만, [[2008년]] [[대침체|세계적인 경제위기]]로 인해 집시 대상 [[증오범죄]]가 크게 증가했다. 일자리가 줄어들고 경제가 나빠지자 무지한 사람들이 아무런 힘이 없는 집시들에게 분노를 돌리는 것. 사실상 경제위기의 근원은 [[미국]]에 있는데도 집시 때문에 일자리가 줄었다며 집시를 대상으로 집단 구타나 심지어 [[살인]]까지 자행되고 있다. 특히 [[헝가리]] 농촌에서는 집시라는 이유만으로 노인이나 어린아이를 총으로 쏘아 죽이는 증오 범죄가 늘어나기도 했다.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2010년]] 아예 집시들을 추방하는 정책을 도입했다. 당시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부위원장 비비안 레딩(Viviane Reding)은 이를 [[비시 프랑스]]의 유대인 추방 정책에 비유하는 한편,[[https://www.theguardian.com/world/2010/sep/14/roma-deportations-france-eu-disgrace|#]] '''"아마 프랑스에 선거철이 다가오나 보다. 사람들은 예산이나 부채 같은 중요한 문제를 다루기 싫을 때 로마니인 얘기를 꺼낸다."'''라는 말로 사르코지를 비판했다. 사르코지는 이로 인해 프랑스의 좌파 대부분으로부터 거센 비판과 비난을 받았는데, 사르코지의 뒤를 이은 중도좌파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 시절에도 집시 추방 조치를 중단하지 않아 나머지 좌파 인사들로부터 또 다시 거센 비판을 받았다. [[루마니아]]에서는 이들을 [[불가리아]]나 [[세르비아]], [[헝가리]], [[슬로바키아]], [[체코]] 같은 다른 동유럽권의 이웃 나라로 추방하려 했지만, 그 나라들도 집시들이 일으키는 범죄와 사회적 문제들을 겪고 있어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바람에 집시들이 갈 곳 없는 처지에 처했다. 2011년 5월 1일 [[체코]] [[브르노]]에서 [[네오 나치]]들의 집회와 시위가 열렸고, 브르노에 꽤 많은 집시 인구가 있는 관계로 주 타겟은 집시였다. 이 시위 얼마 전에는 이 지역 집시 협회의 회장에게 인종차별적 내용이 담긴 익명의 편지가 도착했는데 '집시 여자들은 [[강간]] 같은 거 걱정 마라. 짐승보다도 역겹고 냄새나는 너네들은 안 건드린다'라는 식의 편지였다. 이 시위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체코 국립영화학교인 FAMU의 다큐멘터리과 학생들에 의해 촬영되었다. 영화 중간쯤 이 익명의 편지가 처음부터 끝까지 [[나레이션]]처럼 등장한다. 제목은 .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브르노 같은 영화'. 2011년 9월에는 [[불가리아]]에서 2번째로 큰 도시인 [[플로브디프]]에서 대규모 반(反) 집시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불가리아 집시들은 먹을 게 없어서 [[고슴도치]] 고기까지 먹던 어려운 시절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동유럽에서 대접은 개판이고, 마침 동유럽 지역에서 정규직으로 일해도 버는돈이 서유럽이나 북유럽에서 버는것보다 훨씬 못하니 동유럽의 집시들은 서유럽과 북유럽으로 일하러가는 경우가 많다. 물론 서유럽이라고 해서 차별을 안당하는것은 아니지만, 아랍인이나 흑인이라는 또다른 밑바닥 계층들로 인해서 관심이 분산되는데다가, 건설직이나 공장, 가사도우미, 농부, 청소부 같은 저임금직 혹은 일용직이나, 노점상으로 일한다해도 동유럽에서 똑같이 차별을 당하는 동유럽에서 정규직으로 취직해서 버는것보다 훨씬 많이 벌어서 그렇고, 매춘도 합법이기는 합법이니 화대로 많은 돈을 벌수있기도 하다. 구걸을 해도 하위권 동유럽 국가에서 버는것과 비슷한 수준이기도 하고. 물론 이런 사정은 타 동구권 국가 주민들도 마찬가지이기는 하며, 집시들이 소매치기로 유명한것처럼 동유럽 마피아들이 1990년대와 2000년대 초에 악명이 높았기는 했다. 하지만 동유럽 각지에서 서유럽으로의 인구 유출로 노동인구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1990년대 이후에 출생한 저출산 세대들이 사회의 중축을 담당하게 되면서 심리적으로 집시를 무시하고 다닐지언정 경제적으로나 재정적으로는 더 이상 집시를 무시하고 다닐 수 있는 처지는 아니게 되었다. [[연금]]을 대줄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서유럽]]이나 [[북유럽]]으로 빠져나가는 데다가 인구 감소 속도도 위낙에 가파른 지라 지방 곳곳이 [[유령마을]]로 변하고 있지만, 동유럽권 국가 다수는 이민자들을 끌어모으기에는 임금 수준이 어중간하고 [[난민]]들조차도 서유럽이나 북유럽에 정착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노동 수요를 채울 만한 사람은 집시밖에 없기 때문이다. 집시들이 아무리 기피대상이라 해도 처음부터 정착해야 되는 이민자들보다는 그래도 현지 문화에 익숙한 집시가 적응상의 [[애로사항]]이 적은데, 집시들까지 모조리 내친다면 연금을 누가 대주냐 혹은 일할 사람을 어디서 구하느냐의 문제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물론 경제적인 차별이 상대적으로 완화된다 해도 문화적인 차별이 완화되는 것과는 별개라서, 집시에 대한 차별은 현재진행형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세르비아]], [[북마케도니아]] 같은 구유고권 국가에서도 집시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1950년대와 1960년대, 1970년대에 구 유고 연방 시절 유고 내 민족 통합과 평등을 주창하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 전 대통령으로부터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시민권을 부여받는 등 많은 우대를 받았고, 안정적인 일자리와 주택을 얻어 당시 슬라브인 계열의 유고슬라비아 국민들처럼 잘 살던 때도 있었다.[*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었을 적에 남슬라브인 계열인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같은 구 유고 연방에 속해있는 유고 연방의 구성 공화국들뿐만 아니라 슬라브계 민족이 아닌 [[코소보]]의 [[알바니아인]]이나 [[보이보디나]]의 [[헝가리인]]들에게도 자치권을 부여하고 이들의 언어 사용과 문화 보존을 허용하는 등 다양한 민족우대 정책을 견지했다. 다만 세르비아계를 은근 배척, 홀대하는 경향이 있었는지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이게 발단이 되기도 했다. 헌데 그렇다고 티토가 유고 대통령이었을 시절에도 무조건 세르비아계를 완전히 배척한 것도 아니었다. 티토의 세번째 아내이자 티토 대통령 집권 시기 유고슬라비아의 영부인이었던 요반카 부디사블레비치(Јованка Будисављевић)와 알렉산다르 란코비치 등, 티토 시기에 활약했던 일부 유고슬라비아의 정치인들이 세르비아계 출신이었다. 무슨 특별히 [[세르비아인]] 차별 의식이 있어서 배척한 게 아니라 가장 수가 많고, 정치, 군부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유고의 주도민족으로 세력이 강대한 데다가 융화 정책에 가장 불만이 많은 세르비아계를 그냥 무턱대고 풀어놓았다가는 무슨 사단이 날지 알 수 없으니 견제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유고 연방 결성 이전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발칸 전선에서 유고 내 다민족들의 평등을 외치던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에 입대하여 구 유고 지역을 점령/할거한 [[독일 국방군]], [[슈츠슈타펠]] 등 [[나치독일]]군과 이탈리아 왕국군, [[우스타샤]], [[한트샤르]], [[체트니크]] 등과 싸웠고, 이에 티토는 이러한 집시 출신 파르티잔 대원들의 공을 높이 사며 [[국가유공자]]의 대우까지 배풀었다. 그러나 [[1980년]] 5월 유고슬라비아를 장기통치해온 티토 대통령이 [[노환]]으로 투병 중 사망하고,[* 다리 혈행장애가 악화되어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자세한 건 요시프 브로즈 티토 문서 참조.] [[1980년대]] 이후 [[동유럽 혁명|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으로 [[유고연방]]이 [[유고 내전|내전으로 해체, 붕괴]]되는 과정에서 연방의 분열로 독립했던 각국들이 자기 민족 우선의 정책을 펼치면서 이 나라들에서 살던 집시들도 큰 타격을 받았고, 특히 유고 내전 와중에도 [[세르비아군]], [[크로아티아군]]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군,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내의 크로아티아계, 세르비아계 민병대에 의해 적측의 간첩 또는 회색분자들로 몰려 집시인들도 덩달아 학살당하기도 했는데[* 심지어 유고 연방에서 분리독립한 나라들의 국적으로 변경할 것을 강권하며, 당시 유고 국적을 갖고 있던 자국내 집시인들을 죽이거나 구타하기도 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 와중에 학살과 탄압을 피하기 위해 집시들을 안 좋게 여기거나 차별하던 헝가리나 [[이탈리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그리스]] 같은 옛 유고 연방과 인접한 나라들로 도피했을 정도였다. 물론 유고 내전 당시 상대적으로 전쟁 피해가 적었던 세르비아[* [[코소보 전쟁]] 당시 [[NATO]]군의 공습과 알바니아계 주도의 코소보 해방군과 세르비아 주축의 [[신유고 연방]]군과의 충돌이 있었지만, 90년대 초 중반 크로아티아 전쟁과 보스니아 전쟁 당시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 비하면 전쟁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다.]와 [[슬로베니아]][* 1991년 유고 내전 초반기에 세르비아와 전투를 벌였지만 열흘만에 분리 독립을 인정받는 등 전쟁 피해는 같은 시기에 전쟁이 벌어졌던 크로아티아나 이듬해에 내전이 일어난 보스니아보다는 크지 않았다.], [[북마케도니아]]에서는 [[보스니아]]나 크로아티아에서처럼 학살당하지 않았지만 여기에서도 [[민족주의]]를 앞세운 각국 정부의 자민족 우대 정책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큰 홀대를 받으며 티토 대통령과 유고 연방이 존속했던 냉전 시대때보다 더 낮은 수준의 삶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세르비아의 집시들 중에서도 여[[가수]] [[타나 사비치]]와 축구선수 [[시니사 미하일로비치]] 같이 집시계 세르비아인들중에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적지만 꽤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이 출생민족이 집시가 아닌 [[세르비아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무튼 자신들이 거주하던 구유고 연방이 냉전 체제 몰락 이후에 내전과 분열 등의 혼란상을 겪으며 별개의 국가들로 쪼개지다 보니 이들중에는 티토와 유고 연방 시기를 그리워하거나 티토 사후에 각각 민족우선주의와 분리독립을 앞세우며 내전 및 [[제노사이드]] [[인종청소]] [[대량학살]]을 촉발시켰던 [[크로아티아]]의 [[프라뇨 투지만]] 전 대통령이나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대통령, [[보스니아]]의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전 대통령,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인|세르비아계]] [[스릅스카 공화국]]의 [[라도반 카라지치]] 전 대통령 등 [[유고 내전]] 당시 각 구유고권 지역의 전 지도자들을 [[증오]], [[멸시]]하며 집시들에게 온정과 관용을 배풀었던 티토를 추앙, 존경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고 한다.[* 심지어는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위치한 티토의 묘역에 찾아와서 '티토 대통령님 다시 돌아와주세요'라고 말하며 오열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한다.] 현재는 유고 연방이 내전으로 해체되면서 유고 연방 시절에 나름 누렸던 모든 위세와 재산들을 전쟁으로 다 잃고, 여타 동유럽 국가들의 집시들처럼 범죄와 구걸 등에 노출되어 취약하게 살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집시 배우인 나지프 무직이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탈 정도로 재능있는 배우로 출세할듯 싶었지만, 정작 모국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영상산업이 척박하고 실업률도 높아 멀쩡한 직장에 취직할수 없어서 자기 자식들을 제대로 먹일수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살다가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 일도 있었다. 실제로 정근재[*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세르비아어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유일하게 세르비아 등 구 유고권 지역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 드물게 발칸 현대사에 능통하며 세르비아 등 구 유고권 국가들에 대한 편견과 부정적인 시선도 일부 잡아주는 답변을 하기도 한다.] 교수의 말에 의하면 구 유고 내전으로 인해 구유고권 내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민족은 유고 연방 시절에 자기들만의 거주 영토 없이 [[유고슬라브인|유고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평화로이 살다가, 연방 해체 과정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큰 피해와 참상을 입고도 유고 연방 붕괴 이후에 자기들만의 독립국가조차 만들지 못하고, 연방 해체 후에 분리독립되어 생겨난 발칸 동유럽권 나라들의 하층민으로 몰락한 그 지역의 집시족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3f286c3beea6e5c3d9920edd6301c91f.jpg]] [[루마니아]]의 부유층 집시 하지만 집시들이 죄다 다 빈곤으로 불우하거나 범죄에 빠져사는것은 아니고, 사업을 벌여서 대박을 냈다거나, 가수, 스포츠 선수로 인기를 얻어서 성공하는 경우도 종종 있기도 하고, 딱히 크게 성공을 거두지 않더라도 자영업에 종사하거나, 자동차 딜러, 보석세공업에 종사하거나, 공무원에 취직하거나, 말 조련사나 좀 버는 점술가로 살아가는 경우에는 평범하게 잘 살기도 한다. [[축구]] 선수로 성공한 집시들끼리 모여서 [[로마니인 축구 대표팀]]을 결성해서 [[NF-보드]]와 관련된 축구 대회에 출전하기도 한다.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의 [[히카르두 콰레스마]]도 집시 출신인데 로마니인 축구 대표팀의 에이스이다. 특히 집시왕을 비롯한 집시 부자들의 경우에는 비싼 집을 짓고 성채를 사거나, 람보르기니, 포르쉐를 비롯한 비싼 [[스포츠카]]들을 사들이면서 집시들도 이렇게 잘먹고 잘살수있다면서 공개적으로 부를 과시하기도 한다. 차별을 많이 받는 동유럽 집시라 해도 잘먹고 잘사는 사람들은 해당 계층내에서 소수라할지라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비율이 적어서 그렇지. 이들은 대부분 [[유럽]]의 내로라 하는 나라의 2군에 해당되는 실력을 가진 선수들 위주라서, NF-보드에 소속된 팀 중에서는 꽤나 강팀에 속한다. [[FIFA 월드컵]] 유럽 예선을 뚫을 정도는 아니지만. 특히 [[루마니아]]의 '부제스쿠'라는 도시[* 알렉산드리아 서부에 있는 조그만 소도시이다. 알렉산드리아 자체도 인구 5만 정도에 불과한 수준인데, 부제스쿠는 더 적어서 알렉산드리아 인구의 1/10 정도의 수준.]에 사는 집시들은 루마니아에서도 알아주는 부유층이다. 공산정권이 붕괴했을 때 금속거래, 고철판매로 막대한 수익을 거뒀는데, 워낙 돈이 많아 [[세금]]도 두둑히 내주다보니 루마니아 정부도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덕분에 으리으리한 집에서 금으로 도배된 온갖 사치품 속에서 살아간다. [[https://www.youtube.com/watch?v=OjwFHeKXv0Y|관련 보도]]. [[내셔널 지오그래픽]]지 2012년 9월호에서도 이들을 다룬 바 있다. 다만 이에 대해서 루마니아 사람들의 반응은 사회적 기생충들이 뇌물을 동원해 거액을 번다면서 배아파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씁쓸한 현실이다.(...) [[파일:attachment/Maria-blonde-roma-girl-found-near-Farsala.jpg]] [[파일:attachment/article-0-18F5271700000578-820_634x360.jpg]] 2013년 [[그리스]]에서 집시 부부가 아동 "[[유괴]]"로 체포되었다. 이 까무잡잡한 집시 부부에게 [[금발벽안]] [[하얀 피부]]를 가진 "[[백인]]" 소녀 마리아라는 딸이 있었던 것. 언론은 이 가엾은 소녀를 금발 천사(blonde angel)라고 부르며 진짜 혈육에 대해 조사했고, 아마도 [[북유럽]]계 부부 여행객이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유전자 조사 결과 마리아의 실제 부모는 양부모처럼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집시로 드러났다. 심지어 이 부부의 슬하에는 마리아 외에도 백인처럼 보이는 자녀가 여럿 있었는데, 이에 대해 집시는 원래 인종이 많이 섞인 편이라 부부에게 유럽계 백인 피도 흐르고 있었다는, 즉 [[격세유전]]이라는 얘기가 있고 아니면 부친 쪽이 [[알비노]] 유전자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마리아가 아동 [[인신매매]]로 넘겨졌는지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모친 쪽은 "아이들을 기를 능력이 안 돼 마리아를 다른 이들에게 맡겼을 뿐, 돈은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마리아를 돌려받고 싶다고 말했다. 어찌되었건 마리아는 유괴된 아이가 아니었고, [[북유럽]]계가 아닌 집시 부부의 딸인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 로미 커뮤니티의 반발이 거세다. 집시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집시들은 피부가 모두 까무잡잡하다는 [[편견]][* 앞서 언급되었듯 집시는 애초에 [[백인|코카소이드]]인 데다가, [[유럽]]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유럽계 주민들의 피도 섞였기 때문에 [[금발]] [[벽안]] 집시도 얼마든지 있으며, 이 사건에 대해 자기 자식들도 피부가 희니까 아동 유괴범 취급할 것이냐며 비아냥거리는 로미들도 있다.]에서 일어난 사건. 사실 이런 케이스는 마리아뿐만이 아니라 여러 번 있다고 한다. 유대인이나 집시가 흔히 생각하기에는 철저한 순혈주의로 다른 인종과 전혀 [[통혼]]하지 않을거 같지만 그건 전혀 아니며, 처음정착했을때만 해도 제법 괜찮은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이 당시에 유럽인들과 결혼하는 경우도 흔했고, 반대로 드문 경우라해도 집시들이 말을 제공해주는 방식으로 출세해서 귀족, 명문가들과 통혼하는 등의 사례들은 있엇다. 2015년에는 [[프랑스]]의 한 집시 여자아이가 생후 2개월 만에 사망하였지만, 부모가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주지역 묘지 매장이 거부되어 논란이 되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6860789|#]] 공공 장례 시설 이용에 대한 패널티는 인종차별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지나치게 융통성 없고 비인간적인 처사였다며 비난을 면치 못했다. [[튀르키예]]에서도 집시가 50만명 가량 살고있다. 기존에 정착하던 집시들도 있었지만, 1989년 동유럽 공산체제 몰락 이후 자본주의 체제 전환에 실패하거나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여파로 경제위기와 전쟁을 피해 튀르키예로 건너온 [[발칸 반도]] 국가 출신 집시들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2011년 발발한 시리아 내전의 여파로 시리아 등 중동 지역에서 넘어오는 집시들이 증가했다. 일부 몰지각한 여행객들이 길거리에서 노래 부르고 [[대마초]]를 피워도 좀 봐주는 거와 달리, 집시들이 길거리에 공연하면 경찰들이 신고를 받고 나서서 무자비하게 패거나 재판 절차 없이 일방적으로 감옥에 집어넣는다고 한다. 러시아의 집시는 대우가 타 유럽권 집시보다는 상대적으로 괜찮은 편이며 사회통합도 잘 이루어진 편이다. 사실 러시아라고 해서 집시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아예 없는것은 아니고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집시에 대한 차별이 지방정부와 사법당국, 고프닉에 의해서 공공연히 이루어진적도 있었는데, 러시아의 범죄문제가 얼추 해소된 2010년대에 잠잠해진것이다, 러시아가 위낙에 다 민족국가인데다가 체첸인 등이 나쁜 이미지를 먹고있고, 사회주류에 일찍부터 편입된 경우가 많기때문에 상대적으로 이미지가 덜 나쁜것이다. 러시아 제국시절에 농노로 분류되었지만 토지에 예속되었던 일반농노와는 달리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했고, 남자는 장사, 여자는 춤과 점술로 연명하는 것은 타 국가와 똑같았지만 집시들이 말 장사를 했기 때문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마다 말을 기부하거나 기병대로 입대하면서 지위향상에 성공했었고, 이것이 집시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높은 원인이 되었다. 또한 집시 음악이 러시아 제국 전역에 인기를 끌자, 집시 무용단과 집시합창단들이 잇따라 창설되었고, 적지 않은 집시들이 무용단과 합창단에 소속되면서 귀족과 통혼하기도 했으며, 이런식으로 상당수가 상류층이 되어서 러시아 사회에 성공적으로 통합될수있었다. 소련시절에는 대우가 오락가락했던 편으로, 러시아 내전 과정에서 동족상잔이 벌어졌기도 했고, 러시아 내전이 끝난 뒤로는 집시들이 쓰던 로마니어의 표준화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1933년부터 2차 세계대전 발발직전까지 집시신문이 폐간되고 집시어 표준작업이 중단되는 탄압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집시가 정착생활을 유도하기 위한 작업도 펼쳤고, 이 당시 집시들이 많이 사는 곳을 자치구역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을 진지하게 검토하기도 하는 등 오락가락하는 현상이 심했다. 그러다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집시들이 소련군에 징집되어 열심히 싸운데다가, 집시 예술가들이 선문활동을 벌인 것이 공훈으로 인정되면서 전후부터 집시예술이 유행하면서 집시의 위상은 크게 올라갔다. 그러나 소련 당국에서 1956년에 집시들의 유량생활을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면서 그동안 유량생활을 했던 집시들은 유량생활을 정리해야 했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집시들의 정착생활이 정착되었다. 그와 별개로 집시 예술의 인기는 꾸준해서 집시들이 예능 쪽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소련 해체 이후에는 러시아 사회가 혼란에 빠지면서, 집시 일부가 먹고살길을 찾거나 큰 돈을 벌기위해 [[레드 마피아]]로 입단하면서 집시의 이미지가 악화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대놓고식의 린치가 일어나기도 하는 타 동유럽 국가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덜하기는 덜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을 때도 러시아 편에 서서 우크라이나군과 싸우기도 하였다. 먹고살기 위해 바그너 그룹에 입단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