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징세청부업자 (문단 편집) == 문제점 == 그러나 여기서 몇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1. 국왕 입장에서는 당장 100이 필요해서 3년 간 120을 얻을 수 있는 세금원을 내줬으니 20만큼의 기회비용을 날린 셈이 되므로 더더욱 깊은 자금난에 시달리게 된다. 만일 그 3년 동안 또 돈 들 일이 터진다면 다시 징세청부업자를 부르고, 이렇게 나중에 세금으로 받을 수 있었던 돈이 날아가는 악순환에 빠진다. 실제로 [[앙시앵 레짐]] 시기의 프랑스가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징세권을 징세청부업자에게 넘기며 [[돌려막기]]식으로 자금을 충당했다. 현대에서도 국채를 발행해 부족한 예산을 메우는 등의 일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2의 문제는 벌어지지 않는다. 국채의 경우엔 채권자가 국가에서 돈을 받기 때문. 1. 징세권이 징세청부업자에게 넘어간 지역의 주민들 입장에서도 문제다. 예시로 든 노르망디 지역의 세금 납부량인 40은 '평균' 납부량의 이야기다. 만일 징세청부업자가 징세권을 가진 기간에 전염병이 돌거나 흉년이 들어서 주민들의 사정이 나빠지면 어쩔 것인가? 징세권이 국왕에게 남아 있을 때는 타지에서 세금을 더 거두거나 나중에 다시 받거나 해서 벌충하고 일단 해당 지역의 세금을 감면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징세청부업자는 나중이 없다'''. 징세권을 가지는 3년 안에 원금+이자를 회수해야 수익이 나므로 적어도 40만큼을 꼬박꼬박 걷어야 한다. 1. 게다가 제일 큰 문제는, '''국왕은 징세청부업자가 얼마를 걷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제 민중이 뜯기는 세금은 '''최소한이 40이고, 실제로는 상한선이 없었다'''. 만일 징세청부업자가 농민들을 쥐어짜 50, 60을 걷었더라도 징세청부업자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 징세권을 가진 사람이 자기 권리를 행사한 것 뿐이니까. 때문에 어차피 3년 뒤면 안 볼 사이니 장기적으로 이 지역이 어찌 되든 알 바가 아닌 데다 얼마를 쥐어짜든 법적으로 보호받기까지 하는 징세청부업자는 기본 세율을 올리고 온갖 잡세를 만들어 민중을 쥐어짜게 된다. 로마 시대만 해도 세리들은 적어도 낙찰액의 120%에서 200%의 이득을 얻었다. 탐관오리의 횡포는 불법이라 처벌받기라도 하지 이건 합법적인 징세라 못 막는다는 점에서 더 심각한 문제이다. 1. 왕이 징세권의 공급자/매도자, 예비징세청부업자를 징세권의 수요자/매수자라고 본다면 당연히 징세권 매수 희망자가 많아질수록 가격이 오른다. 왕은 당연히 돈을 가장 많이 주는 사람에게 징세권을 팔 것이고, 그러면 그 징세청부업자는 그만큼 더 많은 본전을 채우기 위해 민중들을 더 쥐어짜내야만 한다. 1. 징세업자들은 집행 가능한 공권력을 가진 게 아니라서 조세 저항에 대한 대응 능력이 없다. 물론 평민이나 빈민들이야 장정 몇 명 고용해서 두들겨 패며 '협조'를 구하면 되지만, 만일 '''귀족이 자기는 못 내겠으니 배째라는 식으로 나오면 징세업자들은 대응할 방법이 없다'''.[* 사실 이 경우엔 왕의 권한을 이양받은 대리인을 무시하는 것이니 왕이 군대를 보내서 도와줘야 하는데, 문제는 중근세 유럽의 군주들은 왕과 영주의 관계가 완전한 상하관계가 아니라 계약관계에 가까웠으며, 왕실 직속의 군사력이 약하다 보니 지방 귀족과 척을 지는 짓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행동이었다. 거기다 애초에 왕 입장에선 이미 받을 돈은 다 받았으니 굳이 이들을 도와줄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상술하였듯 징세업자는 무조건 일정액 이상의 세금을 걷어야 이득을 볼 수 있다 보니 귀족이 안 낸 만큼의 부담은 고스란히 빈자들에게 전가되었다. 흔히 프랑스 혁명 전에 귀족들이 면세권을 가졌다고 알려진 것은 이런 식의 행정구조 때문이었다. 즉, 귀족들이 직접 면세권을 가졌다기보다는 빈자들에게 구조적으로 세금을 떠넘겼다는 게 좀 더 정확하다. 이래서 징세청부업자들은 역사에 처음 등장한 이래로 민중의 혐오와 증오를 한몸에 받는 공공의 적이었다. 그런데 일단은 왕에게 정당하게 권리를 구매한 것이다 보니 [[유대인]]처럼 고리대를 한다고 대놓고 욕할 수도 없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에는 세리인 자캐오(삭개오)가 [[예수]]를 자기 집에 모시자 사람들이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구나!'''라며 수군댔다는 구절이 있다. 예수의 제자 중 1명인 [[마태오]]도 이런 세리 출신이었는데, 예수가 그를 비롯한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자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을 수 있소?'라고 따지기도 했다. 그러자 예수는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반박했다.(출처:[[마태복음]] 9장 1~13절) 또 소금세를 거두는 염세리가 매우 악명이 높았는데, 왜냐면 전근대 유럽에서 여자들은 비싼 소금을 [[가슴]] 사이와 코르셋, 허벅지에 숨겨 놓는 일이 많았는데, 염세리는 소금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그 여성들의 신체를 멋대로 희롱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