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쭌이시 (문단 편집) === 묘족 반란과 직할 전환 === [[파일:중국 해룡둔 3.jpg|width=800]] 해룡둔(海龍屯) 유적 1590년대 파주토사 양응룡은 휘하 호족 가문들과 반목하게 되었고, 그들의 사주로 사천 총독에게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반란을 결심한 양응룡은 1594년 토벌군을 격파한 후 1598년 8만 대군과 거병하여 기강을 함락하였다. 1600년 토벌군 사령관 이화룡은 20만 대군을 8개 길로 진격시켜 118일의 전투 끝에 반군이 농성하던 해룡둔을 함락하였고, 양응룡은 자결하였다. 사로잡힌 양씨 일족은 북경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고, 이로써 [[만력 3대정]] 중 하나인 양응룡의 난은 진압되었다. 한편 그전까지 번성하던 파주 준의현은 10여년 간의 전란을 거치며 명나라의 진압군에 의해 폐허가 되었다. 당시 도시를 방문한 귀주 감부의 양인추는 '천년의 건설이 일순간 터가 되었으니, 지나는 이마다 탄식이구나'라고 소회를 밝혔다. 진압의 후속 조치로 1601년 기존 파주도사 지역은 준의군민부(遵義軍民府)와 평월군민부로 분리되었고, 각각 사천성과 귀주성에 편입되며 조정의 직접 지배 하에 놓였다. 동시에 준희현이 현 시가지로 이전되었고, 기존 도시에는 수양현(綏陽縣)이 설치되었다. 1603년에는 오홍(吳洪), 노문수(盧文秀)가 잔당과 함께 거병했으나 진압되었다. 이후 한동안 잠잠하던 일대는 양응룡의 반란 당시에는 토벌군에 협조하던 수서 & 수동 토사의 반란으로 재차 혼란에 빠지게 된다. 1621년 수서토사(水西土司)의 섭정 안방언(安邦彥)이 귀주선무사 사숭명(奢崇明)과 함께 조정의 요동 파병에 응하는 척하며 중경을 기습 점령 후 촉전왕을 칭하였다. 한족 반군까지 포섭한 그는 준의를 점령하고 성도로 진격하여 102일간 포위했으나 함락에 실패하였다. 그동안 명군은 중경을 수복하였고, 1622년 반군은 296일의 포위에도 귀주 점령에 실패하였다. 1623년 반군은 수동토사(水東土司) 송만화(宋萬化)를 포섭, 재차 공세에 나섰으나 그가 [[진양옥]]에게 패하고 전사하자 산간 지대로 철수하였다. 이로써 준의는 수복되었다. 1628년 사숭명은 대량왕(大梁王)을 칭하며 안방언을 사예대장로에 봉하였으나 이듬해 주섭원의 45만 토벌군에게 패하고 둘다 전사하였다. 이듬해 수서토사 안위, 수동토사 송사은이 항복하자 조정은 타의로 거병한 전자를 사면, 자의로 거병한 후자를 처형하고 수동토사를 병합하였다. 이로써 9년간 이어진 사안지란(奢安之亂)은 진압되었다. 그후 [[청나라]] 시기인 1687년 준의군민부는 준의부(遵義府)로 개편되었고, 1728년에는 사천에서 귀주성으로 이관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