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차미리사 (문단 편집) === [[근화여학교]]를 이끌다 === >나는 가정도 없고 아무런 일가친척도 없다. 하나 두었던 딸은 어디에 있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러니 이 '''근화는 내 가정이고 이곳의 학생들은 모두 내 딸들이다.''' 내 한 몸을 오로지 이 학교와 학생들에게 바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하자.[* <차미리사 평전>, 한상권, 푸른역사, 2008, 240쪽] 차미리사는 근화학원의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근화학원을 위해 일했다. 근화학원은 여성운동가들과 후원인들의 도움 속에서 많은 여학생들을 졸업시켰다. 1925년에는 [[근화여학교]]로 승격하여 정규교육도 실시했다.[* 승격 이전에는 학생들을 상대로 주간과 야간수업을 실시하며 비정규 교육을 해 주었다.] 근화학원을 이끈 차미리사의 여성교육은 '배움의 기회를 잃은 가정부인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는' 교육이라 매우 헌신적으로 여성들의 교육에 임했다.[* 51살에 맹장수술을 하여 병상에 있었을 때 "30년 믿어온 [[예수]]님보다 학교를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학교와 학생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당시 차미리사가 생각해 온 교훈은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였는데 '''주체적 삶, 창의적 지식, 실천적 사고'''를 강조한 것이었다. 또 차미리사는 실용적인 여성교육을 고민했다. 추상적인 고등교육보다는 일반적인 보통교육을 보급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여겼으며 국민 모두에게 교육의 기본적인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고 믿고 근화여학교에 '실천교육'과 '실업교육'을 적용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1926년부터 여학생들에게 [[사진]], [[재봉]], 자수 등을 가르쳤고 학교의 이름도 1935년에 '근화여자실업학교'로 바꾸었다. 하지만 차미리사의 [[근화여학교]] 경영이 언제나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1930년대가 되면서 학교는 재정난에 휩싸였고[* 이 시기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이었던 데다 [[대공황]]의 영향과 파시즘 및 일제의 탄압이 거세졌으므로 학교 재정에 영향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 극복하고자 단행한 여러 정책들은 여학생들과 세간의 비판을 받았다. 대표적인 사례는 재정난을 이유로 학급 수와 교원 수를 감축하려고 했거나 근화여학교에 빚을 지고 있는 다른 여학교의 학사를 차압한 일이었다. 이로 인해 학교에서 2차례의 동맹휴학이 발생했고 차미리사는 '딱장대'[* 성질이 온순한 맛이 없이 딱딱한 사람]라는 불미스러운 별명을 얻어야 했다. 이런 일들에도 불구하고 차미리사는 [[근화여학교]]의 재정난 극복에 앞장서서 1934년 근화여학교를 [[재단|재단법인]]으로 만들 수 있었다.[* 10만 원 정도의 거금이 여기에 들어갔는데 [[이인]], ~~[[김성수(1891)|김성수]]~~, ~~[[윤치호]]~~ 등의 후원이 있었다.] 차미리사는 이를 축하하며 "조선의 딸들과 같이 울다가 세상을 떠나겠다."며 눈물을 흘렸다. 1936년에 근화여자실업학교는 첫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김미리사'에서 자신의 원래 성인 '차미리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편 일제의 탄압도 학교에는 큰 부담이었다. 특히 학교 이름을 두고 '[[무궁화]]'인 것이 마음에 안 든다고 난리였다.~~[[염병하네]]~~ 당시 학교 내에는 무궁화를 심었고 무궁화를 자수 놓는 교육이 있었으며 학생들은 무궁화가 수놓아진 교표를 교복에 달고 다녔다. 이에 일제는 학교를 [[폐교]]시키겠다며 온갖 압력을 가했고 차미리사는 학교 이름을 '덕성(德成)'으로 바꾸었지만 [[교표]]만은 무궁화를 그대로 써서 일제에 마냥 굴복하지만은 않았다.[* 그 [[무궁화]] 교표는 지금도 [[덕성여중]]ㆍ[[덕성여고]]ㆍ[[덕성여대]]에 이어져 내려온다.] 학교의 개명을 이끌어낸 일제는 이제 탄압의 목표를 차미리사로 향했는데 "[[황국신민서사]]를 외지도 못하면 교장 자격이 없다", "[[일본어|국어]] 상용도 못하는 벙어리이니 훈시를 못할 것이다", "요시찰인 명부에 있으니 물러나지 않으면 인가를 취소하겠다"는 식으로 차미리사가 교장직을 내려놓을 것을 강요했다. 차미리사는 이런 공격에도 여러 번 버텼으나 결국 1940년 8월 교장에서 물러났다. 물러난 후 덕성여자실업고등학교는 황국 신민화 교육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말았다. 차미리사의 뒤를 이어 학교 교장이 된 사람은 송금선이라는 여자였는데 [[친일인명사전]]에 오를 정도로 유명한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이 사람도 근화여학교의 학생들에게 일제를 찬양하는 작품들을 쓴 것도 모자라 위안부에 가라고 독려까지 했다(!)~~이화여대도 그렇고 정말 학교의 흑역사다(...)~~]. 이 작자는 [[8.15 광복]] 후 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덕성여대]]에서 초대 학장을 지냈는데 송금선의 자식들이 이 학교를 족벌운영하는 동안 [[본말전도|덕성여대의 창립자로 여겨져 오고 있었다.]] 1997년 이에 반대하는 학내분규가 발생하여 2000년에는 차미리사가 [[덕성여대]]의 창립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걸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송금선이 차미리사가 세운 재단인 "법인 덕성 학원"을 장악해 버렸는데 이것이 차미리사가 근화여학교를 세울 때 같이 만든 재단이라 차미리사가 덕성여대와 고등학교 및 중학교까지 관리했다는 증거가 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덕분에 이름만 달랐지 덕성여자대학교와 고등학교, 중학교는 차미리사가 세운 근화여학교의 정통성 있는 후계 학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덕성여대의 후배 학생들은 좋아하고, 진실이 밝혀져 초대 총장 자리에서 밀려난 송금선은 지못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