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차미리사 (문단 편집) === [[8.15 광복]] 이후의 행보 === 차미리사는 당대의 여성교육자 중에는 얼마 안 되는 때 묻지 않은 사람이었다.[* 대표적인 때 묻은 사람으로는 [[김활란]]을 떠올려 보자. 김활란은 [[이화학당]]에 다닐 때 [[3.1 운동]]에 참가하기도 했고 졸업하고 모교의 교사와 교장(최초의 한국인 교장)으로 일하면서 여성교육과 전도에 힘썼지만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하고 말았다.] 그래서 [[8.15 광복]] 이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관계를 맺으면서 [[이승만]]과는 거리를 두었다. 신탁통치 논쟁이 벌어졌을 때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이후 [[남북분단]]이 기정사실화되자 다른 지식인들과 함께 남북협상을 지지 및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결국 남북은 분단되었고 [[6.25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휴전된 지 2년 만인 1955년 6월 1일 차미리사는 "내게는 한 가지 한이 있다. '''온전한 독립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유한이로다.'''"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