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차이나타운(인천) (문단 편집) == 상세 == 명실상부 [[인천광역시]]와 [[중구(인천광역시)|중구]]를 대표하는 [[인천광역시/관광|랜드마크 관광지]]로 사랑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차이나타운'이라고 말하면 이곳을 꼽는 이들이 많다. 서울, 부산, 대구 등에도 차이나타운이 있지만 인천 차이나타운의 규모가 압도적으로 넓은데다 대한민국에서 대표적으로 꼽는 중국 음식인 '''[[짜장면]]의 탄생지'''가 이곳이라서[* 엄밀히 말하면 짜장면은 정통 중국 음식이 아니다. [[산둥 반도]]에서 면장을 볶아서 먹던 [[작장면]]이 한국에서 변형된 것이 오늘날 짜장면의 유래라고 알려져 있다. 그 '''한국식 짜장면이 탄생한 곳'''이 인천 차이나타운의 식당이던 [[공화춘]]이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차이나타운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이 지역은 그저 한적한 해안가 어촌이었다. 조용하던 어촌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 후반부터다. [[강화도 조약]]에 의해 1883년 [[인천항]]이 이 지역 바로 옆에 강제 개항되고[* 인천항 내항 부두 중에서 원도심과 가장 가까운 8부두가 차이나타운 바로 서쪽에 있다.] 인천항을 통해 [[청나라]] 사람과 [[일본]] 사람은 물론 [[서양]] 사람까지도 몰려들면서 세계 각국의 문화가 유입됐다. 구한말에는 [[일본인]]과 [[화교/대한민국|화교]]들이 섞여 살았고[* [[개항장 역사문화의 거리]]에 각국 조계지 계단이 있는데 오늘날의 차이나타운이 있는 계단 서쪽(북성동·선린동)이 청나라 조계 지역이라 청나라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계단 동쪽(송학동·관동) 지역이 일본 조계 지역이라 일본 사람들이 살게 됐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간 뒤 화교들이 주로 거주하면서 차이나타운으로 바뀌게 됐다. 인천에서 가장 먼저 근대 외국 문물이 도착한 지역답게 [[자유공원|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원]]과 [[관세청|최초의 세관]] 등이 이 지역 부근에 있었다. 아울러 이 지역에 있던 중국요리 식당 [[공화춘]][* 현재의 [[짜장면박물관]]. 차이나타운 내에서 '공화춘'이라는 간판을 달고 영업하는 중식당과는 무관한 곳이다. 실제 공화춘 주인의 후손은 차이나타운 아랫쪽에서 신승반점이라는 이름의 중국요리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에서 한국식 [[짜장면]]이 탄생했다. 오늘날의 관광지로 개발되기 전까지는 다소 음침한 분위기의 마을이었다. 구한말에 지어진 중국식 건물이 세월의 흐름 속에 낡아졌고 그 건물에 다수 화교들이 거주하던 상황에서 주거지역과 상업지역 사이에 [[중국/문화|중화권적인 조형물]]이 듬성듬성 설치된 곳이 1990년대까지의 차이나타운이었다. 현재의 짜장면 거리에 있는 중국요리 식당도 이 시기에 운영됐지만 지금처럼 유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2000년대 초반부터 [[화교/대한민국|재한 화교]]들의 거주 여건 개선과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인천시와 중구가 나서서 대대적인 정비 사업과 구한말 개항장 문화재 복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했고 그 결과 지역 분위기가 매우 깔끔해졌다. 깔끔해진 지역 분위기와 함께 [[수도권 전철 1호선]]의 종착역인 [[인천역]]이 코앞에 있는 접근성이 장점으로 작용하면서 [[월미도]]와 개항장 거리를 잇는 인천 원도심의 대표적 관광지로 각광을 받게 됐다. 물론 관광지로 개발된 이후에도 여전히 화교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다. 2015년 집계치 기준으로 북성동 전체 인구의 15%는 화교라고 한다. 최근에는 [[화교/대한민국|재한화교]] 거주지, [[화교학교|인천화교소학교·인천화교중산중고등학교]], [[중국 요리|중화요리점]], [[만두|만두집]], [[도교]] 사원, [[불교/대한민국|불교]] 사찰, [[유교|공묘]], 중화감리교회[* [[가톨릭]]을 믿는 화교들은 지역 [[교구]] [[성당]]에 출석한다. [[교적]] 시스템 때문이다. 이 지역에 거주 중인 화교 신자들과 한국인 신자들을 위해 세워진 성당이 차이나타운 한복판에 있는 [[천주교 인천교구]] 해안성당이다.], 짜장면박물관, [[화교/대한민국|화교역사관]], [[한국-대만 관계|한중문화관]] 등 [[중화권]]과 관련된 곳 외에도 [[대한제국|개화기]] 시절 건설된 [[천주교 인천교구]] [[주교좌]] [[답동성당]], [[대한성공회 내동성당]], 구 선교사 자택 등 서양식 건물, [[적산가옥]] 등 [[일본/문화|일본식]] 건물이 남아있다. 처음에는 성공적이지만은 않았지만 도심 재개발 이후 인근 동화마을의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관광객 수가 늘어 성공하게 되었다. 특히 [[차이나타운]]의 경우 관광상품화가 되면서 [[짜장면]]의 개발지, 전례지로 하려는 인천시 자체의 노력, [[화교/대한민국|재한화교]]의 노력 및 일부 귀국 등으로 인해 [[중국요리|중화 요리]]가 유명하다. 주변에 맛있는 [[만두]] 가게, [[월병(과자)|월병]] 가게 등이 있다. 참고로 정말 맛있는 짜장면을 먹는 것이 목적이라면 차이나타운 밖으로 나가 화교가 운영하는 오래된 가게를 가는 것이 성공 확률이 더 높다. 2020년에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대대적으로 확산되면서 인천 차이나타운 역사상 유례없는 [[불황]]에 시달렸다. 다른 원도심 내 [[재래시장]]들과 비슷하게, [[사스]]나 [[메르스]] 때도 이 정도 불황은 아니었는데 상황이 심각하다며 해당 구역 상인들은 그야말로 사업이 쉽지 않다고 언급했다. 상당수는 휴업 중이고 일부 가게는 폐업도 고려했다. 게다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온상처럼 혹은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이나 [[중국 공산당]]과 연관되었다는 오해를 받아 [[제노포비아]]와 [[대한민국/인종차별|인종차별]]의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냉전]] 시기에 쓰이는 [[중공]]이라는 단어가 다시 쓰일 정도였다. 특히 [[화교/대한민국|화교 역사]], [[양안관계]]를 모르는 [[한국인]]들의 오해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인천 차이나타운 거주민들은 [[대한민국 여권|한국 여권]]과 [[대만 여권|중화민국 여권]]을 보유하는 [[복수국적|이중국적자]]나 [[대한민국 여권|한국 여권]]과 [[대만 여권|중화민국 여권]] 중 하나만 갖는 단일국적자의 비중이 높으며, [[대만|중화민국]]과 관계가 깊고 [[중국|중화인민공화국]], [[중국 공산당]]은 아무 관계가 없다. 그리고 거리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오성홍기]]가 아닌 중화민국의 [[청천백일만지홍기]]가 다수 눈에 띌 정도인데다 [[간체자]] 간판이 하나도 없고 [[정자(한자)|정체자]] 간판만 있다. 이러한 광경이 목격되고 하면서 이제는 오해가 풀려서 [[대만|중화민국]] 출신의 [[화교/대한민국|한국 화교]]를 중국 공산당과 엮는 사람은 없다. [[2022년]] 4월 이후 거리두기가 해제되면서 인천 차이나타운도 소생하고 있다. 특히 [[수도권 전철 수인선]]의 개통으로 그간 [[인천광역시|인천]]에 오기 힘들던 [[용인시|용인]], [[성남시|성남]], [[수원시|수원]], [[화성시|화성]], [[오산시|오산]] 등 경기 남부 지역 사람들까지 찾게 되어 더욱이 활기를 띄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