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차이나타운 (문단 편집) == [[대한민국|한국]]의 차이나타운 == 한국에서는 [[조선]] 말기인 [[19세기]] 말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주요 항구가 개항하며 한성 근교로 한성의 관문인 [[인천광역시|인천]]과 일본과 가까운 [[부산광역시|부산]]의 [[청나라]] [[조계|조계지]]에 [[산둥성]] 출신 [[한족]] 농민공들이 노동자 신분으로 대량으로 유입되어 차이나타운이 최초로 형성되었다. 하지만 한국은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가 [[화교]]가 해외에서 경제적인 실권을 쥐려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안보적인 문제로 간주하여 그들을 지속적으로 탄압했다. 특히 박정희 정부의 경우 화교에 가했던 탄압 중 하나가 [[1961년]] 외국인토지소유금지법으로 화교들의 부동산을 압수하고 소유 규모를 제한하였으며 [[1963년]] 화폐개혁[* 그 시절만 해도 한국 화폐 단위는 환이었다. 그걸 현재 쓰는 원으로 새롭게 화폐를 바꾸면서 종전 환을 많이 가진 외국인은 교환을 못하게 만들었다.]을 강행, 화교들이 모아온 재산을 죄다 몰수했다. 심지어 [[중국집]] 쌀밥 금지령 온갖 종류의 화교에 대한 억압이 계속되었다.[* 영챔프에서 연재되었던 '내 파란 세이버'란 만화에서 이 내용이 언급되었다. 주인공의 집이 중국요리집이었는데 주방장이 [[화교]]로 손화명(자신은 '슨거허민'이란 본토 발음으로 불려지는 것을 선호한다.)이란 이름을 갖고 있었다. 화교들이 겪는 규제로 불편해하다 나중에는 한국을 떠난다.]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서울 중구 소공동 화교촌을 중심으로 정부가 탄압으로 차이나타운을 와해시키다시피했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일제 당국은 하세가와쵸[* 현재의 소공로]를 새로 뚫었는데 이것은 용산으로의 군사 이동을 용이하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실제로 화교 상권을 둘로 쩍 갈라버리는 효과도 있었다. 또한 서울시청 앞 플라자호텔 일대는 [[1970년대]] 초 재개발이 되면서 화교회관이 들어오기로 되어 있었지만 당연히 이루어지지 못히고, 애물단지가 된 부지는 한화그룹이 인수하여 현재의 한화타운[* 시청 앞 플라자 호텔이다.]이 되었다.[* 원래는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 방한 당시 화교촌부터 남산 밑 해방촌까지가 그대로 미국 TV 전파를 타면서 이것은 나라망신이랍시고 재개발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재미교포를 중심으로 나온 것이 계기였다.] 또한 일부러 중국을 크게 무찌른 민족 영웅의 이름인 [[을지문덕]]에서 따와서 [[을지로]]라 지명을 개칭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결과적으로는 [[서울특별시]]의 보상대책을 [[대한민국 정부|한국 정부]]가 부작위를 통해 이행하지 않았고, 나아가 화교 공동체가 박살난 꼴이 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국무총리와 서울시 당국자가 [[동남아시아]] 순방 당시 거의 사죄 방문 성격으로 경유지 [[타이베이시|타이베이]]에 가서 기자회견을 해야 했다. [[국부천대]] 이후 화교들은 자의든 타의든 [[중화민국]] 국적이었다. 과거의 한국은 제대로 된 영주권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므로 화교들의 지위는 영주권자도 아니고 그냥 장기거주 외국인이었다. [[영주권]]도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지급되었다. [[1997년 외환 위기]] 등을 겪으면서 해외 투자자 문제가 생기자 개선한 것도 사실이다. 이 시기부터 [[화교/대한민국|재한화교]]들이 대거 [[대한민국|한국]]으로 귀화하기 시작했고 이들이 [[대한민국 여권|한국 여권]]과 [[대만 여권]]을 [[복수국적|보유]]하기 시작했다. 그 뒤 [[대한민국 정부|한국 정부]]도 [[대만]]과의 [[한국-대만 관계|관계]] 때문에 [[화교/대한민국|화교]]에 대해 우호적으로 접근했다. 이제는 [[2003년]] 영주권자 지방선거 투표권, [[2007년]] 외국인공무원 임용으로 화교들도 정당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는데다가 한국 화교들의 [[대만]] 귀국자를 제외하고는 거의 한국으로 귀화했고 [[복수국적|이중국적자]]들도 군 복무는 다 했다. 특히 화교 중학에는 군복 입은 남자 졸업생들이 입대 후 휴가 나와 인사 차 방문하는 경우도 흔했고 지금도 흔하다. 군복무까지 한 한국 화교를 [[한국인]]으로 인정 안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2010년]] 이후로 [[조선족]]으로 대표되는 [[중국|중화인민공화국]] 출신 신화교들이 대거 들어온 현재의 상황에서는 화교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중국인[* 조선족과 한족 모두 포함]들의 한국 내 거주 인구수와 한국 내 중국인 커뮤니티 크기를 보면 결고 작다고 할 수 없다. 부산의 차이나타운 지역은 [[대한민국 정부|한국 정부]]의 대대적인 화교 탄압에 냉전이 끝나자 국제항인 [[부산항]]으로 건너온 [[러시아인]], [[우즈베키스탄]] 사람들도 많다. 신화교 구역과 전통적인 한국 화교 구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 동구권 구역, [[태국]] 및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구역이 나뉘었다. [[2015년]] 이후 대대적 정비를 거치며 구역이 확실히 나뉘어 사실상 서울의 이태원같은 다국적 다문화 지구가 되었으며 치안도 [[부산항]] 북항 재정비와 함께 동구 일대가 완전히 갈아 엎어져 개선되었다. [[대구광역시|대구]]의 경우, 대구에 사실상 하나 밖에 없는 도심지에 차이나타운이 조성되어 있다 보니, 화교들이 대다수 동화되어 흩어져서 살아가고 있거나 시내가 워낙 가깝다 보니 시내에서 장사를 하거나 둘 중 하나다. 무엇보다 [[부산광역시|부산시]]는 [[2010년]]부터 차이나타운 축제를 열고 있다. 여담이지만 [[6.25 전쟁]] 당시 대량의 [[중국 인민해방군|중공군]]이 수장된 파로호를 조롱삼아 차이나타운이라고 지칭하기도 하는데 절대로 하면 안 된다. [[대만|중화민국]]이 여전히 존재하고 [[범람연맹]]이 유의미한 상황에서 이런 조롱은 자칫하면 [[6.25 전쟁]]에 참전한 [[화교/대한민국|화교]] 참전용사들에게도 모욕이 되는 만큼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 [[화교/대한민국|재한 화교]]들은 이를 굉장히 싫어한다. [[화교/대한민국|재한 화교]]들은 [[1992년]] 한중수교를 극구 반대했으며 특히 [[화교학교]]가 [[중국공산당|중공]]에 의해 통제되는 것을 극히 우려했다. 그러나 [[주한국대만대표부|주 한국 대만 대표부]]를 포함한 대만 정부 기관이 [[화교학교]]를 열심히 후원했고, [[화교/대한민국|재한 화교]]들의 반발이 커서 [[화교학교]]는 여전히 [[주한국대만대표부|주 한국 대만 대표부]]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화교 학교에서는 [[정자(한자)|정체자]]와 대만식 [[표준중국어|국어]]를 교육하고 [[쑨원]] 초상화를 걸어놓았다. 배우는 교재 역시 [[대만]]의 교육 과정과 [[대한민국|한국]]의 교육 과정 위주이며 [[중국]]의 교육 과정은 아예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