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차지철 (문단 편집) == 기타 == * [[교보생명]][* 당시 [[대한교육보험]].]이 [[경복궁 광화문|광화문]] 사옥을 건설하려 할 때, 층수를 낮추라고 압박을 주었다. 그러자 오히려 대산 [[신용호]] 창업주가 "그럴 바에 [[할복]] 자살하겠다."고 하여 [[역관광]] 당하였다.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5&nNewsNumb=002408100015|#]] * [[을지로]] [[롯데호텔 서울]] 건설에서 40층 이상 지으려 하자 [[청와대]]가 내려다 보인다고 안 된다고 하였다. 결국 [[김종필]] [[국무총리]]의 권한으로 37층까지 건설하였다는 타협 합의를 내보였다. [[https://news.joins.com/article/18416990|#]] * [[개신교]] 신자로서 [[여성]] 관계에 있어서는 대단히 깨끗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그 당시 정치인들은 [[외도]]가 일반적이었고 정부를 두는 경우도 있었지만 차지철은 [[아내]]만 바라볼 뿐 다른 여성은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다만 모종의 이유로 6개월 만에 [[이혼]]했던 전처가 있기는 했다. 차지철 측의 주장으로는 시어머니를 잘 모시지 못했다거나 혹은 [[사생활]] 문제가 있었다고 하나 이혼의 진짜 사유는 당사자들만 알고 있을 것이다. * 차지철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차지철이 청탁을 들은 척 안 했다며 차지철의 지인에 대한 청탁이 들어오자 기도만 해주고 그냥 보냈다고 하나 차지철의 금전 문제가 깨끗했다는 측근들의 주장은 상당히 가려들어야 한다. 이렇게 차지철이 청렴했다는 주장은 경호실에서 차지철을 보좌했던 부하들이나 측근들이 소스인데 신빙성이 매우 의심스럽다. 차지철이 죽은 뒤 [[미국]]으로 이민간 후처는 거기서 2천만 [[미국 달러|달러]]짜리 저택을 소유하였으며 아내뿐만 아니라 처남도 비슷하였다. 심지어 차지철 [[사망]] 직후에 차지철의 아내가 사기를 당했는데 액수가 14억원이었다.[* 당시 막 분양된 40여 평형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약 3천만원이었다. 14억원이면 지금도 거금이지만 그 때는 감히 상상도 못했을 금액이다. 2017년 시점으로 환산하면 수백억 대다.] [[피아노]] 연주자였던 차지철의 후처가 이유없이 이를 소유했다면 출처는 차지철밖에 생각할 수 없으니 청렴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거기다가 그렇게 사기당하고 경황없는 와중에 [[재산]]도 다 챙기지 못했을 텐데도 미국에 2천만 달러짜리 저택을 구입한 것을 보면 더 많은 자금을 보유했다는 유력한 증거가 된다. 위의 청탁에 관련된 일화도 차지철이 그 [[선배]]와 그다지 친하지 않았거나 혹은 자기에게 떨어질 떡고물이 그리 크지 않아서 들어주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이후락, 박종규 등의 비리 규모는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차지철이 상대적으로 청렴하다고 평가 받는 부분도 있다.[* 의외로 꽤 많은 3, 4공화국을 다룬 책이나 인사들의 인터뷰에서 그가 청렴하다고 기술되긴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당시 5.16세력들의 비리는 엄청났다. 박정희는 '적당히 하시오'라고 지나가는 식으로 경고하다가 이들을 비리로 날려버리는 방법도 즐겨 사용했다.] * 옆에 있는 사람의 손목을 잡고 "주여"하면서 기도를 하던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심지어 [[국민]]의 95% 이상이 [[불교]] 신도인 [[태국]]을 방문했을 때 [[불상]]을 보고 [[우상숭배]] 운운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건 한 나라의 주요 인사라고 보기 힘들 정도의 대단히 무례한 결례이며 태국에서 불교는 국교나 다름없다. 또한 [[한국]]에서도 불상은 매우 흔하게 볼 수 있었고 [[박정희]] 집권 기간에 [[부처님오신날]]이 [[공휴일]]로 지정된 점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무개념]]한 발언이기도 했다. * [[파일:attachment/hymnofmotherland.jpg]] [[작사가]]로 활동한 경력도 있다. 위 [[사진]]의 [[EP]] [[음반]]에 담긴 '조국의 찬가'와 '민족의 노래'가 차지철 [[작사]]로 표기되어 있다. 물론 대학 [[학력]]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누군가가 작사를 대신 해주고 차지철은 이름만 올렸을 수도 있다. 둘 다 평범하다면 평범한 [[건전가요]] 수준의 노래들이지만 박정희와 차지철 사후 이 노래들을 누가 불렀다는 기록이 전혀 없으며 작곡가 [[김희조]]에게도 마찬가지로 불명예스러운 기록이 되었다. 두 곡 중에서 '조국의 찬가'는 [[https://www.ehistory.go.kr/page/view/movie.jsp?srcgbn=KV&mediaid=11388&mediadtl=25543&gbn=MH&quality=M|이곳에서]], '민족의 노래'는 [[http://www.ehistory.go.kr/page/pop/movie_pop.jsp?srcgbn=KV&mediaid=12609&mediadtl=29577&gbn=MH&quality=W|여기서 들어볼 수 있다.]] 두 영상 자료는 1970년대 초반쯤에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든 영상물인데 조국의 찬가는 영상 맨 앞, 민족의 찬가는 영상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들어볼 수 있다. * 차지철에 대한 평가는 좌우 막론하고 매우 나쁘다.[* 당대에도 평가가 좋지는 않았는데 오죽하면 박정희의 [[암살]] 소식이 전해졌을 때 정부 인사들이 가장 먼저 [[의심]]한게 차지철이었다.] 박정희 정권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박정희에게 [[아부]]하면서 전횡을 일삼은 사람이 좋게 보일리 없으며 박정희 정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는 악영향을 준 [[간신]] 취급을 한다. 차이점이라면 이런 사람을 매우 총애하며 감싸던 사람도 부정적으로 보는지 아니면 윗선을 현혹시켜 권력에 빌붙은 간신이라고 보는지 정도. 해당 정권에 부정적인 쪽에서는 당연히 끼리끼리 같은 놈들이라고 욕하고 해당 정권과 지도자에 긍정적인 쪽에서는 '''[[주군]]을 망친 간신'''으로 엇갈리는 견해는 [[마오쩌둥]]과 [[4인방]],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시절 [[이승만]]과 [[이기붕]] 또는 [[곽영주]]의 평가를 두고도 유사하다. [[권력]] 구도의 측면에서 보면 개인의 품성 문제를 넘어 차지철의 득세 자체가 박정희 정권의 말기적 징후 중 하나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박정희의 이른바 '''2인자 박치기'''는 정권 내에서 박정희를 독단으로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을 가진 실세 [[2인자]]의 출현을 막는 기능을 하는 동시에 정권의 핵심 인물들간에 균형을 유지해주는 절묘한 순기능도 하고 있었다는 것. 그런데 차지철이 사실상 2인자로 대두하면서 이런 균형이 무너지고 말았으며 이는 당시 박정희가 여전히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었던 것과는 별개로 정국에 대한 통제력과 통찰력을 상실했음[* 이 시기에 박정희는 권력 구도의 균형을 적절히 유지해 나갈 수 있는 정권 내부에서의 정치적 감각을 상실했음.]을 보여주는 근거로 여길 만하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는 이승만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는데 이승만도 이러한 방법으로 정권을 유지했지만 80대에 접어들어 평소 자주 접견하는 주변의 고위 인사들을 무조건 신임하게 되었고 [[자유당]] 고위 인사들, 곽영주 [[경무대]] [[경찰서장]][* 지금의 [[대통령경호처장]] 격이었다.]은 '''부부통령'''이라는 [[별명]]이 붙여질 정도로 대통령의 총애를 [[마패]]로 삼아 각종 물의를 일으켜 이는 [[4.19 혁명]]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차지철의 경우 정권 내에서 자신의 능력과 업적 등을 크게 인정받아서 독자적인 자기 영역을 구축한 인물이 아니라 철저히 박정희에게 아부를 떨어 생긴 [[친위대|친위 세력]]이었고 세대 측면에서 봐도 박정희에 비하면 한 세대(거의 20년), [[김재규]]나 [[김종필]] 등에 비해도 반 세대(10년) 가까이 젊은 인물이었음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정권 초중기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실세 1920년대생(50대) 세대를 거르고 1930년대생(40대) 세대인 차지철이 2인자로 부각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당성과 전문성을 가진 정부 조직 대신 개인적인 지인만을 신뢰하여 부당한 정치 개입을 허용하였다가 국익에 해를 끼친 사례는 가까이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이 발생할 경우 정말 운좋게 그 심복이 재능과 인격을 겸비한 인물이 아니라면 당연히 국가에 심각한 피해를 끼칠 수밖에 없다. 애초에 훌륭한 재능과 인격을 겸비할 정도의 인물이면 어느 개인에게 아부하기보다는 당당하게 자신의 능력을 통해 뜻을 펼치려고 할 것이다. 하다못해 정치적인 면을 배제하고 업무 능력 면으로 봐도 [[칭찬]]할 거리가 없다. 박정희의 마음에나 들었을 뿐 업적을 남긴 바도 없고 [[최후]]에도 대통령을 지키는 [[대통령경호실장]]이라는 자가 [[호위]] 대상이 위기에 쳐했는데 자기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느 면으로 봐도 좋은 평가가 드문 것. * 성격은 매우 [[개차반]]이었다. 차지철이 4선 의원인데 국회의원 시절 다른 의원들을 주먹으로 때리는 못된 버릇이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같은 시기의 국회의원 중에서 무려 [[김두한]]이 있었다. 김두한의 입장에서 보면 본인은 '''[[야인시대|싸움의 신(神)]]'''인데도 불구하고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데 차지철같은 애송이가 자꾸 무고한 의원들을 주먹으로 패고 있으니 기분이 되게 나빴다. 하루는 김두한이 상의를 원전히 탈의한 후 차지철 바로 앞에 우뚝 서더니 "차의원이 그렇게 힘이 쎄다며? 그럼 힘 없는 다른 의원들은 건드리지 말고 '''나와 맞붙는 것'''은 어떠한가?"라고 일침을 날렸다. 이에 차지철은 김두한 앞에서 아무 소리도 못 했다. [[박정희]]가 이걸 알았는지 훗날 차지철은 국회의원을 그만두고 경호실장으로 발령나게 된다. * 1975년에 진도군수가 청와대에 진돗개를 선물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진도’라 부르며 정성 들여 키웠다. 진도는 대통령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매우 공격적이었다. 1978년 어느 날 본관 2층으로 올라가던 차지철 경호실장은 달려든 진도에게 엉덩이를 물려 박정희의 [[신당동(서울)|신당동]] 사저로 ‘격리 조치’되었다. 진도가 차지철을 물어뜯을 때 주위에서 이를 발견해, 재빨리 떼어놓지 않았다면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성깔대로 엉덩이가 어떻게 되었을 것인지는 아주 선명하다. 차지철은 병상에 쉬게하고 다른 경호실장을 임명했다면 현대사는 많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 차지철의 딸이 국가유공자 등록 소송을 했다.[[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8122675|기사]] 1심에서 법원은 차지철의 딸이 국적을 포기했으므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으나 항소를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국적과 별개로 간신배가 국가유공자가 될 수 없다는 의견이 있다. * [[모에화]]가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animation&no=319260&s_no=319260&page=10|등장했다.]] * 배우 [[이순재]]와 동갑이며 같은 한날에 출생했다. * 배우 [[임원희]]와 매우 닮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매체에 나오는 차지철 배역을 임원희에게 줘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 [[고인드립]]으로 총을 맞고 죽었다는 것과 맞물려 김재규의 말을 "너 Gun[[Bang]]져!"라고 하는 드립이 있다. * [[전두환]]과의 관계에서 전두환은 차지철보다 3살이 많았다. 전두환과 차지철은 군인 시절 공수특전단에서 함께한 바 있으며 1960년 [[레인저 스쿨]] 입교 동기이기도 하다. 차지철은 정규 육사 출신을 질투하고 있었고 전두환에게 콤플렉스를 느꼈을 것이며 전두환도 정규 육사 11기라는 자부심 때문에 포병 간부라는 뒷문으로 장교가 된 차지철에게 고까움을 느낄 법 했지만 두 사람의 사이는 겉으로는 좋았다고 한다. 차지철은 중령으로 예편해 장성에 대한 열등감이 컸으며 육사 12기 시험에서 떨어졌던 사실도 쉬쉬했고 육사 출신을 싫어했는데 그런 차지철 밑에서 전두환은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맡았다. 전두환이 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관 김성익에게 했던 공식 구술에 따르면 박정희는 1년에 2번 전두환을 청와대에 초청하고 장성 진급 때는 승용차를 하사하는 등 가까이 대했다. 이 때문에 청와대 돌아가는 내막을 잘 아는 전두환은 차지철과의 관계에 있어 능수능란하게 처신했다. 차지철이 국회 내무위원장으로 있을 때 업무 차 찾아갈 때마다 "충성! 중령 전두환, 내무위원장님께 용무 있어 왔습니다!" 하는 신고를 하여 흡족하게 했다. 특히 차지철이 자신의 위세를 보이기 위해 매주 실시한 [[국기하강식]]에서 준장 계급장을 단 전두환이 제병지휘관이 돼 ‘경호실장을 향하여 받들어 총!’ 구령을 하며 차지철 앞에서 [[열병식]]을 지휘하곤 했다. 전두환은 [[하나회]] 회장 자격으로 장성으로 진급한 하나회 후배들을 차지철에게 소개시켰고 차지철은 이들에게 지휘봉과 금일봉을 수여하였다. 하지만 10.26 사건 이후 차지철에 대한 여론이 나쁘자 전두환은 차지철의 유해를 [[국립묘지]]에 매장하는 것을 취소하였고 차지철 유해는 차지철의 어머니가 다니던 영락교회 묘지에 묻히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